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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연 Nov 09. 2024

여행의 미학

교토 여행과 행복의 의미

 기억과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는데,
그것이 바로 제가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카페, 나무, 도자기를 사랑하는 저에게 교토는 영감의 도시입니다. 시내 거리에서 마음에 드는 도자기를 집어들 때마다 그 쓰임을 자연스럽게 상상하죠. 편백나무 온천탕에 몸을 담근 뒤 자판기에서 뽑은 시원한 말차라떼 한 잔을 마시면 삶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물론 소나무와 붉은 단풍, 작은 연못으로 꾸며진 에이칸도의 일본식 정원까지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단정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기억, 계속 이곳에 머물고 싶다는 기분을 그냥 두고 가기 싫어서, 접시가 깨지지 않게 감싼 옷 뭉치들 사이에 끼워 넣고 캐리어를 잠갔습니다. 여행의 기념품은 핸드폰 사진첩이나 캐리어 속 면세품 봉투에만 있지 않죠. 처음 가본 타국의 공간이 주는 영감, 말을 잘못 이해했을 때의 긴장감, 지금껏 살아온 곳에서는 접하지 못했던 가치들은 기억과 마음속에 남습니다. 그리고 기억과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는데, 그것이 바로 제가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짧은 여행이 지나가는 아쉬움이 커지며 한편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모든 영감과 감동을 그대로 삶에 녹이고 싶다고. 계속 머무르고 싶은 공간에서 떠오르는 영감, 꿈속인 듯 멍해지는 편안함... 이런 것들이 모든 걸 멈추고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가서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토 여행의 영감이 일상에 녹아들도록 새롭게 마음을 먹었죠.


  한국으로 돌아와 방을 치우고, 서랍의 물건을 전부 꺼내 다시 정리했습니다. 교토의 직물 디자인 브랜드 소우소우에서 산 천 포스터 중 어느 것을 먼저 벽에 걸지 고민했습니다. 료칸에서 보았던 침대헤드의 나무질감과 비슷한 가구를 찾고 명상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구상했습니다. 새롭게 바뀔 공간을 상상하니 설레기도 하고, 이런 나만의 공간이라면 하루하루가 즐겁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일상에서의 은은하고 지속적인 행복에 대해 글을 쓰다 문득 친구와의 대화가 생각났습니다. 언젠가 친구는 ‘소확행’이라는 말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친구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이, 어쩌면 사람들이 소소한 행복은 행복이 아니라고 여기는 증거라고 말했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라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곧 친구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행복이란 가치를 크고 작음으로 측정하고, 좋다 나쁘다 판단하는 사람들의 생각 자체를 비판했던 것이죠.


 친구의 말대로였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거나 뛸 듯이 기쁜 행복으로 나뉘는, 측정할 수 있는 양자택일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그저 ‘행복’이 필요합니다. 즐거운 상태를 유지하고, 행복과 설렘이 철없는 사람이 가진 비현실적인 감정이 아니라 당연한 삶의 권리라고 생각할 마음 말입니다. 친구와의 대화 이후, 저는 아침에 좋아하는 그릇에 빵 한 조각을 담는 행복과, 울면서 쓴 학업계획서가 장학금 심사에 통과하는 기쁨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여행의 이야기라면 어떨까요? 우리는 어쩌다 몇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의 타국에서 지내고, 며칠 동안 일을 그만두고 휴가를 떠나 돈을 펑펑 쓰는 것이 ‘진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여행을 원하고, 떠나고 싶어 하죠. 하지만 저는 ‘워라밸’이나 ‘일과 삶의 균형’, ‘소확행’이라는 말들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즐거움을 유지할 능력을 얼마나 잃어가는지 체감합니다. 일과 삶이 그렇게 다른 걸까요? 행복은 '소소한 행복, 큰 행복, 확실하지 않은 행복, 확실한 행복…' 이라는 부류로 나눌 수 있는 걸까요? 여행의 행복이 커다랗고 분명한 행복이라면, 일상의 행복은 그보다는 못하다는 말일까요?


  여행은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다녀오는 몰입 강한 행복입니다. 하지만 그런 여행을 다녀올수록 사회와 타인이 원하는 일들에 허덕이다 도피하듯 갑작스러운 행복을 찾는 삶의 방식에 회의를 느낍니다. 익숙함을 벗어나는 설렘, 처음 맛보는 음식을 먹고, 새로운 가치관을 만나는 경험은 여행에서만 허락된 것일까요?


  인생이 ‘일상과 여행의 균형’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자체가 여행이길 바랍니다. 그래서 여행의 기쁨과 내 삶의 즐거움이 별반 다르지 않기를, 행복의 정도와 크기를 재는 삶이 아니라 그저 매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삶을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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