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쯤 되었을 때, 그림을 그리고 글 쓰는 일을 하겠다고 엄마에게 선언(?)했었다. 그리고 수 년이 지나 원하는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아침 학교에서부터 저녁 기숙사까지 24시간을 동기들과 섞여서 수많은 작업물과 공모전으로 경쟁을 했다. 나름대로 치열한 시간끝에 성취도 여러번 맛보았지만 3년의 시간동안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내가 그림과 이야기를 사랑했다기보다 그저 남들보다 잘하는 무언가에 집중했고, 칭찬을 먹고 자랐을 뿐이었다는 거였다. 어설픈 완벽주의와 누구도 강요한 적 없던 승부욕으로 재어봤을 때 그림에 대한 내 애정은 생각보다 연약했다.
크게 관계없는 전공으로 대학을 가고, 그마저도 아닌 분야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문득 고등학생 시절이 떠오르곤 했다.
사실 그림 뿐만 아니라 모든 삶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사랑하는 것이라도 때로는 견뎌내야했고 남들에 휘둘리지 않고 앞만 보고 가야할 때가 있었다. 그 첫번째 순간이 좀 일찍, 10대 후반에 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때의 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조금만 힘이 들면 나의 것이 아닌 줄 알았다.
돌이켜보면 주변에 따뜻한 조언을 해 줄 사람들이 가득했는데도 나는 스스로를 채근하며 끊임없이 다그쳤고 구석으로 내몰았다. 좀 더 편안한 마음을 가졌어도 되는거였다. 밤을 새가며 스트레스 받고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울고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아도 됐었다. 천운으로 내 꿈을 지지하는 가족들을 만났으니 그저 묵묵히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거였다.
요즘엔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 돌아보면 마찬가지겠구나, 너무 잘 하려고 욕심내지 말고 그저 하루하루 부지런히 나아가는 게 옳은 길일지도 몰라,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