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의 기억

부제: 머리핀

by 강차곡
얼마 전, 날씨좋은 날 길을 걷던 사람들

10살은 내게 꽤나 고통스러운 한 해였다.
같은 반에 지독하게도 나를 괴롭히던 여자애가 하나 있었는데, 여느 어린이들처럼 단순한 수준이 아니었다. 친구인 척 잘해주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창피주기를 교묘하게 반복하며 고차원적인 수치심을 선사하는 아이였다. 눈매가 매섭고 활달해서 다른 반에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반면에 나는 조용하고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렇게 그 아이가 매번 손쉽게 사람들을 포섭하고 나면 나는 엉거주춤 그 울타리에 갇혀 먹잇감이 되곤 했다.

언젠가 우리반에 여자 교생선생님 네 분이 오셔서 몇 주간 수업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분들의 인기는 가히 대단했다. 특히 그 아이는 자기가 맘에 드는 선생님 한 명을 정해놓고 공공연하게 티를 내며 관심을 독차지하려했다.

마지막 수업날이 되자 선생님들은 우리 모두에게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며 한명 한명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만화그림이 그려져있는 8절 스케치북을 받았고 다른 친구들의 색연필, 지우개 선물을 볼때마다 자기 것과 비교하며 안도했다.
내 차례가 되자 선생님은 조그만 종이 쪽지 두 장을 주었다. 괴롭히던 여자애가 좋아하던 그 분이었다. 한 장에는 짧은 편지가, 다른 한 장에는 머리핀이 꽂혀있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10살 깡마른 어린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고 아가씨들이나 할법한, 보석이 알알이 박힌 S자 모양의 작은 머리핀이었다.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써있었다.

'OO이는 참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것 같아. 선생님은 OO이가 멋진 여자가 될 거라고 생각해.'

1998년, 23살의 그 여대생은 60이 넘은 할아버지 담임이 방관한 문제를 해결할 어떠한 권한도 없었을것이다.
다만 1년 내내 힘들었던 나는 그 핀 하나 덕분에 '멍청하게 당한' 것이 아닌 '힘든 시간을 견뎌낸' 성숙한 아이로 정의되었다.

참고로 날 괴롭혔던 그 아이는 매 학년마다 대상을 바꿔가며 같은 행동을 반복했음이 드러났다. 중학생때는 학교 홈페이지에 학폭 가해자로 공개적으로 고발되었고, 고등학생때는 학생회에 회부되었다. 정학 처분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살면서 누구나 끝이 보이지 않고 지독하게 힘이 들 때가 있다. 그 편지와 머리핀이 없었더라면 열 살의 기억은 오롯이 누군가를 향한 원망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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