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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둘리지 않는 마음

1일 차

by 착한별
채널 예스, 커버스토리


책 주문할 때 가격 맞추려고 한 권씩 산다는 채널 예스. 잡지 입장에서 보면 끼워 팔리는 기분이 썩 좋지 않을 것 같다. 막상 세상에 나와보니 단독으로 팔리는 책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래서 나는 너희들만 주문하기로 했다. 100원이라는 가격보다는 가치 있다는 걸, 너만 골라서 사는 독자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담고 또 담다 보니 비싸고 두꺼운 책 한 권만큼 되었다. 예상대로 책은 바로 오지 않았다. 분명 창고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코로나 시기 전에 나온 것들까지 찾느냐고 누군가는 먼지를 털며 투덜거렸을지도 모른다. 가격은 싼데 무게는 나간다며 포장하던 누군가는 한숨 쉬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희들은 누군가 우리를 찾는다며 기뻐했을 거라고, 창고를 나올 때 야호! 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그렇게 너희들을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우선 커버스토리만 따로 분리했다. 나에게 다시 쓰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할 문장을 찾고 싶어서였다. 브런치 작가는 아무나 되는 거 아니라며 시도도 안 했던 날들이 있었고, 그래 한 번 시도나 해보자 하고 마음먹었을 때 운 좋게 단번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내게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장 먼저 준 것은 브런치였다. 나도 이제 작가라는 기쁜 마음에 쏟아내듯이 급하게 썼다. 그런데 아무 글이나 신나게 써서 올리던 어느 날, 다른 사람들의 브런치 글을 둘러보고, '쪽팔림'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무거나 써도 되는 곳이었지만 아무렇게나 쓰면 좌절하게 되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이었다. '쓰는' 행위 자체를 높이 사서 브런치는 내게 '작가'라는 타이틀을 주었지만 '작가'라는 무게를 감당하기엔 난 '덜 익은 사과'일 뿐이었다. 그렇게 브런치를 뛰쳐나간 후 다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계기는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광고였다. 작년 이맘때 급하게 글 열 개를 휘리릭 써서 응모하고 기대했던 내가 생각나서였다. 어느새 일 년이 지났다. 일 년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었다. 일 년 동안 꾸준히 썼다면 좋았을 텐데 '꾸준한 마음'을 지키지 못했던 내가 아쉬웠다. 나를 다독이고 달래서 다시 돌아왔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면 그냥 다시 아무거나 쓰자고. 아무거나 쓰다 보면 내가 무엇을 쓰고 싶은지 알게 될 거라고 그렇게 나를 설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글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하다. 그렇다면 나는 뭐라도 써야 하는 게 맞다.


이제 다시 나의 글을 써야지, 마음 다잡았는데 SNS에서 본 글 하나가 또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작가인데 무척 화가 난 상태로 쓴 글이었다. 내용은 이렇다. SNS에 하루에도 수십 명씩 책 한 권 내고 '작가'라는 이름을 달고 등장하는데 자신이 생각하기에 '글을 쓰는 사람'과 '작가'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개나 소나 작가'라는 표현을 했다. 자기를 갉아먹으며 노력해서 작가가 되었는데 '개나 소나 작가'에 자신이 포함되는 것이 불쾌하단다. 작가라는 이름은 결코 가벼운 명패가 아니니 아무나 작가라는 소리 좀 하지 말잔다. 참고 참다가 올린 글이 분명해 보여서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다시 읽어보다가 했다. 그는 자신의 기분 나쁨으로 다른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그러기를 의도한 걸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 사람이 왜 이런 글을 썼는지 챗 GPT에게 물어보았다. 지금은 누구나 글을 쓰고 자가 출판도 가능하니까 기성 작가의 입장에서는 내가 고생하며 얻은 지위가 아무 노력 없이 복제된다는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단다. 즉, 전문성과 깊이에 대한 자부심이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들에게 작가는 단순히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삶 전체를 글에 걸고 사는 사람이기에 그 무게를 가볍게 쓰는 게 싫은 것이다. 챗 GPT의 말을 들으니 화가 난 작가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이해되었다. 하지만 이제 막 책 한 권을 낸 사람이나 그 책 한 권을 내고 싶어서 노력하는 사람이 읽으면 마음의 상처가 되겠다 싶었다. '개나 소나 작가'라고 말하지만 책 한 권이 될만한 글을 완성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글을 완성한다고 해서 다 책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개나 소나 작가'가 되고 싶어도 못 되는 사람이 많은 게 현실이다. '개나 소나 작가'도 아직 못 된 내가 읽기에는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하고 경계 짓는 느낌의 글이어서 씁쓸했다.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는 통역사를 인하우스 통역사라고 한다. 나는 인하우스 통역사로 오래 일했다. 학부만 졸업했어도 하는 일이 '통역'이면 통역사라고 불리는 게 당연한데 통역대학원을 나온 사람들은 그것을 무척 기분 나빠했다. 자신이 들인 시간과 노력과 돈이 있는데 동급으로 불리는 게 싫었던 거다. 학부졸업생은 통역대학원을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일하고 통역대학원을 나온 사람은 감히 나에게 이런 통역을 시키냐며 퇴사하기도 했던, 그 시절이 기억났다. '작가'라는 이름은 아무나 쓰면 안 된다고 하는 글 덕분에.


GPT의 결론은 "누가 작가인가?"라는 정의 싸움이라고 했다. 기성 작가들은 '작가'를 전문성과 헌신의 결과로 보지만, 새로운 세대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으로 본다는 것이다. 창작의 본질은 '결과'보다 '태도와 행위'에 있다고도 했다. 당신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고, 그 과정을 통해 세상을 표현하고 있다면 이미 작가이고, 그것을 생업으로 삼느냐 취미로 하느냐는 단지 형태의 차이일 뿐이라고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었다. 챗 GPT의 대답을 듣고 나니 '개나 소나 작가'의 글을 읽었던 내 마음이 조금 풀렸다. 나도 다시 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나 소나 작가'가 되고 싶어졌다.



채널 예스의 커버스토리만 자르고 오려서 묶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있었다. 백수린 작가가 예비 작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휘둘리지 않고 자기가 쓰고 싶은 걸 써 나가다 보면 결국에는 어떤 식으로든 작품을 발표할 수 있게 되더라는 얘기다. 외부적인 것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이 있는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는 의미였다.


그렇다. 나는 '휘둘리고' 있었다. 남의 영향이나 분위기에 쉽게 흔들리는 나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시선에 휘둘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이 '휘둘리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겠다. 그래서 급하게 브런치를 다시 열었다. 생각나는 대로 브런치북 이름도 지었다. 매일 뭐라도 쓰겠다는 다짐도 썼다.


오늘도 뭐라도, 한 문장이라도.

이건 진짜 내 마음이다. 이 마음이 또 휘둘릴까 봐, 사라질까 봐 얼른 브런치북을 만들었다. 매일 연재하기로 체크했으니 오늘도 뭐라도 썼다. 내일도 뭐라도 쓰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꾸준히 쓰는 사람으로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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