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차
매년 시댁에서 제철 꽃게를 살 때마다 우리도 챙겨주신다. 아들이랑 손주 해먹이라고 주시는 건지 아는데 손질이 귀찮아서 나는 우선 냉동실에 넣어버린다. 올해도 꽃게를 가져가라고 하셨는데... 때마침 아빠와 시댁에 가 있던 아들이 그 얘기를 듣고는 " 우리 집 냉장고에 꽃게 아직 있는데."라고 말해버렸단다. 아들에게 왜 엄마를 곤란하게 만들었냐고 했더니, 사람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단다. FM 단호박 아들이다. 게다가 시어머니 아들인 남편도 "우리 집에 커다란 찜기도 없어요."라고 전화기에 대고 말하는 걸 내가 듣고 말았다. (하아... 둘이 어쩜 이렇게 똑같지? 김 씨들과 살기 힘들다.)
그래서 꽃게찜을 할 만한 찜기를 샀다. 내가 만든 꽃게찜을 맛있게 먹는 손주 사진을 시부모님이 계신 단톡방에 보냈다. 이번에는 바로 해 먹였다는 인증을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아들 키우다 보니 남편을 볼 때마다 내 아들의 미래 같아서 짠하다. 더 잘해줘야지 생각하게 된다. 남편과 손주를 바라보는 시어머니의 마음도 점점 이해된다. 내가 시어머니가 되면 내 아들도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버지일 테니.
여기까지 읽으면 내가 좋은 며느리 같지만 사실 난 다 계획이 있었다. 건강을 위해 야채찜을 점심으로 먹은 지 10개월이 다 되어간다. 커다란 찜기가 있으면 나도 더 편할 거란 계산을 한 거다. 나름 치밀했던(?) 계산이었는데 내 삶이 '시트콤'인 걸 또 잊고 있었다. 먹기 좋게 자른 야채를 올리고 인덕션을 켰는데 몇 분이 지나도 물 끓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물을 넣었다고 생각한 내 실수로 찜기 바닥에 크고 작은 검은 점이 몇 개 생겼다. 물 넣으라고 말도 못 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느라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을 찜기의 마음 같았다. 다행히 집에는 탄 냄비를 세척해 주는 매직버블클리너(?)가 있었지만 물 없이 열이 가해졌던 시간이 찜기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까 싶어서 많이 미안했다. 우리 집에 온 지 이틀 만에 찜기는 검은 점 테러를 당했다.
검은 점을 보면 나는 두 가지가 떠오른다. 우선은 피터레이놀즈의 그림책 <점>이다. 그림책에서 선생님은 베티에게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한 번 시작해 보렴.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고 말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시작해 보라는 용기를 준다. 베티는 연필을 잡고 신경질적으로 도화지에 점 하나를 찍는다. 그리고 그 점이 이야기의 시작이 된다. 또 하나의 검은 점은 드라마 <아내의 유혹>에서 여주인공이 얼굴에 찍고 나왔던 검은 점이다. 점 하나 찍은 걸로 다른 사람이 된 걸 표현한 것이 꽤나 큰 이슈가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당시에는 좀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점' 하나로 '새로운 나, 달라진 나'를 표현했던 작가의 상징적인 의도가 탁월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두 개의 검은 점을 떠올리니 나도 점찍고 싶어진다. 나도 '시작하는 용기'를 내고 싶고 '새로 고침'하는 태도를 갖고 싶다.
얼마 전에 그림책 모임에서 이량덕 그림책 <시작점>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림책의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작고 까만 점은 단순한 점이 아니다. 문을 열게 하는 문고리가 되고, 생명을 피워내는 씨앗이 되며, 시간을 엮어내는 시계부품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이 하나의 점이 곧 모든 것의 근원이자 동력이 됨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다. 그 덕분에 독자는 작은 점이 가진 '시작'을 감각해보기도 하고 그 '힘'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최근에 울고 웃으며 읽은 조승리 에세이 <이 지랄 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에도 '점'이 나온다. 물론 여기서 점은 중의적인 의미다. 이렇게 내가 보는 책들, 보내는 일상과 시간, 만나는 사람과 상황들 속의 무수히 많은 점들을 떠올리다 보면 끝이 없겠다.
찜기의 검은 점을 보고 나니, 점이 나오는 이미지들이 떠올랐고 얼마 전에 발제했던 그림책 <시작점>까지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하나의 점이 나의 생각을 점점! 더 확장시켰다. 나에게는 어떤 '시작점'이 있으면 좋을까? 요즘 나는, 해보지 않았던 것들에 도전해보고 싶다. 익숙하지 않은,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에 들어가 낯선 분위기를 감각해 보고 싶다. 한 번도 해보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일들의 목록을 적어봐야겠다. 그런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아직 아무것도 시작 안 했는데 벌써 재밌다.
나의 '시작점'을 상기시켜 준 새까맣게 탄 점이 생긴 찜기에게 고맙다고 말해야겠다. 다시는 너에게 검은 점을 만들어주지 않겠다는 약속도 함께. 미안하고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