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차
어떤 노래는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가게 한다. 싸이월드 도토리로 열심히 사 모았던 노래들 중 하나가 어느 날 라디오에서, 드라마에서, 카페에서... 흘러나오면 어김없이 나는 '그때의 나'로 돌아간다. 단 3분으로 사람을 과거로 다녀오게 하는 힘이 음악에는 있다. 그런데 그 힘이 책에도 있다는 것을 오늘 알았다.
2023년 10월부터 매주 목요일에 참여하고 있는 그림책 모임이 있다. 6명이서 매주 한 사람씩 돌아가며 그림책으로 발제를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책을 나누는 시간이다. 같은 그림책을 여럿이서 보면 그림책을 통과해서 나오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다. 모임장께서는 공평하게 사다리게임으로 발제 순서를 정해주시는데 이번에는 내가 4번째를 뽑았다. 각자 어떤 그림책으로 할지 톡에 올리는 게 그다음 할 일이다. 자료를 검색하다가 표지에 눈이 가는 그림책을 만났다.
제목만 보고도 어떤 내용일지 짐작되었다. 지마는 러시아 남자아이 이름이고, 겨울 열차는 시베리아 열차다. 그림책은 자신의 경험치만큼 읽어내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나는 그림책을 좋아한다. 그림책계에서 유명한 글작가인 윤여림의 신작이기도 하지만 나와의 연결고리가 있을 것 같은 기대감으로 그림책을 사게 되었다. 나의 아들이 좋아하는 기차도 나오니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으로도 딱이었다. 주문한 그림책이 오늘 왔다.
그림책은 러시아어와 영어 글 부분을 한글로 발음 나는 대로 적어놓았다. 영어를 알아보는 사람이야 많겠지만 러시아어까지 알아보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 주인공이 러시아어를 못 알아듣는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놓은 것이 이 그림책의 한 수인 것 같다. 그림책은 러시아어 원문을 써놓지 않았고, 그게 무슨 뜻인지 구구절절이 설명해주지도 않는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감으로 파악하는 주인공과 같은 상황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우연히 만난 러시아 아이와의 인연에서 마음을 주고받는 데 필요한 건 언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러시아어 가능자인 나는 어색한 한글 옷을 입고 있는 러시아어를 읽어낼 수 있다. 겨울 열차가 시베리아 열차이고, 그 열차는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서 모스크바까지 7일 걸려서 간다는 것도 알고 있다. 4일 차에 열차에서 내린듯한 주인공의 도착지인 얼음 호수는 바이칼 호수라는 것도, 지마가 주인공에게 선물한 목각인형의 이름이 마트료쉬까이고, 러시아 사람들은 마트료쉬까를 선물로 잘 준다는 것도 나는 안다. 왜냐하면 이 글을 쓴 작가처럼 나 역시 시베리아 열차를 탄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나의 기억은 겨울이 아니라 여름이었다는 것만 다르다.
대학 4학년 2학기부터 결혼 1년 차까지 약 15년 동안 러시아어로 밥 먹고 살았다. 러시아어를 배운 시간까지 합하면 거의 20년을 러시아어와 알고 지냈다. 그런데 결혼 후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나는 '이제 러시아어를 다 잊어버려야지.'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예전에 뭐 했냐고 누가 물을 때마다 전직 러시아어 통역사라고 말하는 것이 싫었다. 사실, 나는 러시아어가 싫다. 수능을 다 찍었지만 영어만은 풀었던 나의 영어 점수는 만점에 가까웠다. 외국어영역만 잘 본 나에게 담임은 외국을 1년 보내주는 대학에 원서를 써주었다. 영어도 아니고 러시아어라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학을 가긴 갔지만 학교도 학과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방황했고 반항했다. 공부도 안 하고 과제도 안 해가고 백지 시험지를 내는 나 자신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나의 사춘기는 고1에서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그러나 나의 사춘기는 차가운 나라, 러시아에서 얼어버렸다.
대학교 2학년, 스무 살. 집을 떠나 무려 다른 나라에서 1년 동안 살 수 있었다. 호기심 많은 나에게 신기하고 재밌는 날들이었다. 그중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는데, 여름 방학에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학교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따라 여행한 것이다. 우리는 하바롭스크 역에서 시베리아 열차를 3박 4일 동안 타고 울란우데라는 역에 내려서 또 차를 타고 한참을 갔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바로 바이칼 호수였다.
그렇게 나에게도 3박 4일을 열차에서 지낸 경험이 있다. 작가가 지마라는 러시아 아이를 만난 것처럼, 나는 기차에서 가슴에 국가 훈장 배지를 가득 달고 있는 러시아 할머니를 만났고 러시아 아이도 만났다. 그리고 러시아어 한마디도 못하면서 혼자 여행 왔다며 우리를 반가워하던 휘문고 국어 선생님도 만났다. 처음에는 열차밖 풍경에 감탄했지만 계속 같은 풍경이 지속되니 지루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열차가 서면 사 먹을 수 있었던 산딸기와 삶은 감자도 생각난다. 3일을 제대로 씻지 못해 노숙자 모습이 되어가는데도 열차에서 루텔라 잼을 빵에 엄청 발라먹으며 신나게 떠들던 기억도 난다.
그림책 한 권이 내가 잊고 있던, 사실 잊어버리고 싶었던 내 스무 살의 러시아를 소환해 냈다. 원하지 않았던 러시아어를 전공해서 직업으로 삼아 살아왔던 날까지 모두 기억해내게 했다. 갑자기 쏟아지는 기억들을 두서없이 받아쓰게 했다. 사진첩을 다시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들게 했다.
내 발제 순서가 4번째이니 12월의 어느 겨울에 나는 이 그림책을 소개하게 될 것이다. 그날은 눈이 올지도 모르겠다. 우리 멤버 중에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그림책 속 글과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테니 어쩌면 이 그림책을 소개해야 하는 게 내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나만이 할 수 있는 발제일 테니 말이다. 그림책 이야기를 하다가 내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러시아어를 이렇게 또 써먹게 될 줄이야. 다 잊은 줄 알았는데 그림책이 전부 다 소환해 버렸다.
이야기는 나에게 있다는 말, 쓰지 않을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쓰게 된다는 말을 체험한 날이었다. 그림책 한 권에서 자꾸만 나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우선은 이곳, 브런치에 담아보았다. 아마도 발제 준비하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꺼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