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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 Nov 13. 2021

추위 속에 하는 자기 탐구

보일러 없이 보내는 시골의 겨울



어떤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서야 우리는 스스로에게 상당히 무지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나는 나에 대해 얼마나 알은체를 해왔던 것일까. 깊이, 또 오래 스스로를 탐미해 본 적이 있기는 했나-.





눈을 감고 끝도 없는 우주를 상상한다. 아주 아주 작은 먼지 하나의 티끌을 떠올린다. 다음엔 차례로 소중한 것들을 그 공간으로 데려온다. 싫어하는 것들도 데려온다. 꿈도 데려온다. 과거도 세워본다. 그렇게 우주를 가로, 세로로, 좌, 우로 계속 채우면서 확장시켜본다. 나의 명상은 이렇듯 어떤 정해진 방법도 규칙도 없는 막무가내 식이지만 오로지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보는 명상이나 경험의 시간들은 미처 몰랐던 나의 현재를, 기호나 취향 같은 것을 새로 발견하게 한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끝없는 음울의 깊이까지 다양하게. 나는 최근 음식을 먹을 때 그것이 차가운 것이든 뜨거운 것이든 상관없이 코를 훌쩍거린다는 것이나 누워있을 때 자주 오른쪽 다리를 접어 세운다는 사소한 행동들을 깨달았다. 또 시골집의 추운 겨울을 두 해나 보내면서 내가 생각보다 추위를 잘 견디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아내었다. 그간 나는 한기보다는 열기에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실은 한기를 더욱 잘 견디는 체질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든.





시골에서 맞는 첫 해의 겨울, 아궁이가 있던 자리에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모양으로 굴뚝을 낸 연탄보일러가 그 뜨거움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쌀쌀한 아침 기운에, 어느 집이나 굴뚝에 연기를 피워내거나 드르륵 기름보일러 트는 소리로 하루를 열어갈 때 우리 집은 이전과 다름없이 비어있는 집처럼 연기도 없이 고요했다. 연탄보일러를 틀어도 안방에만 불이 들어온다기에 나는 고장 난 연탄보일러 고치기를 과감히 포기하고 중국산 레지에이터를 샀다. 첫 나의 시골 월동 준비는 새로 산 레지에이터와 겨울마다 의지하던 온수매트, 작은 할로겐램프, 실내용 누빔 외투(깔깔이), 수면양말이 다였다. 산 아래 마을의 추위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호기로운 선택이었지만 다행히도 그 해 겨울은 예외적인 포근한 추위로 나의 시골살이를 응원해 주었다. 포근한 추위. 역설적이게도 그 해 겨울은 정말 딱 그랬다.


그렇다고 아주 춥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잠이 들었다가도 코 끝이 시려 꼭 새벽에 깨어 이불을 고쳐 덮곤 했다. 처음 사용하는 레지에이터는 전기값이 걱정돼서 자기 전 4시간 정도만 틀었는데도 극강의 건조함으로 두 뺨에 선명하게 촌년병을 남겼다.


시골집 특성상 대청마루를 끼고 일자로 방들이 나열되어 있고 앞 뒤로 난 창이 맘껏 바람을 드나들게 하기에, 나는 단열재까지 사서 안방 뒷문을 아예 막아버렸다. 부엌과 작은 방에도 창호지로 난 문이 있었는데 그 나름의 시골스러운 낭만이 있어 그곳만은 막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 때문에 화장실을 가거나 부엌에서 뭔갈 할 때면 너무 추워서 항상 입김이 났다. 아침에는 꼭 물을 끓여 싱크대로 흘려보내야 하기도 했다. 바깥으로 나 있는 싱크대 배수관이 밤 기온에 얼어버려 뜨거운 물로 녹여주지 않으면 막혀 내려가지 않았다. 일어나 커피를 내리는 것보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싱크대 녹이는 일이라니. 그리고 그게 익숙해진 듯 자연스럽게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는 나. 이런 상황이 어이없이 웃겨서 아침 바람부터 허공으로 입김이 실실 흩어져 나왔는데 그 모양과 웃음소리가 약간 끓을락 말락 하는 찻주전자와 닮아 있었다.


그렇게 집 안팎의 온도차가 크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침대 밖을 잘 벗어나지 않는 생활을 하게 됐는데, 그런 누에 같은 생활이 어떤 면에선 재밌기도 했다. 이불을 두르고 앉아 노트북으로 못 봤던 시리즈물들을 종일 보고, 몸을 덥히는 펄펄 끓는 음식들만 골라 해먹으면서 게으른 겨울을 보냈다. 신기한 건, 친구들이 여기저기서 보내온 귤이 유일한 비타민군 섭취였음에도 그 추위 가운데 감기 한 번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추우니까 씻는 건 말할 것도 없이 패스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 돈을 벌러 세상에 나가기 위해 억지로 단장을 할 필요도 없다. 종일 눈곱을 달고 있으나 머리에 기름진 상투를 두르고 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건, 생각보다 훨씬 자유로운 일이었다. 그 온전한 자유가 딱 머리가 근질거려지기 전까지의 하루 이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좀 아쉽긴 했지만.


자유를 박탈당한 나, 곰솥에 물을 끓인다. 보일러가 없는 이 집에서 비싼 온수기를 들이는 대신 나는 시멘트를 반죽할 때 쓰는 막대 모양의 전기 히팅기를 샀다. 물을 가득 채운 곰솥에 히팅기를 꽂아 넣고 기다리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물이 데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시멘트를- 아, 아니, 기름진 머리를 감기 위해 공사장 느낌을 물씬 풍기며 번거로움을 감수한다. 여기서 재미의 포인트는 인간은 정말 적응의 동물이란 것이다. 신기하게도 머리 감는 주기가 점점 길어졌다. 나는 가렵지 않으니 더는 귀찮고 싶지도 않다는 두피의 강력한 의지 표명. 그때, 아무리 약간의 결벽이 있는 나라지만 스스로에게는 굉장히 관대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한 번의 겨울이 또 지나고 다시 겨울이 오고 있다. 올해는 새롭게 전기 온열 테이블을 장만했다. (일명 코타츠.) 서울로 돌아가기 전까지 짐을 늘리지 않기로 했지만 갑갑한 수면양말 없이도 따뜻하게 테이블 아래로 발을 들이밀고 책을 보고 귤도 먹는 상상을 한 찰나, 단숨에 결제 버튼을 누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요즘은 간편 결제 때문에 구매 절차가 간소화돼서 정말 큰일이다. (간편 결제 탓을 해본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새벽 공기에 코 끝이, 타자를 치는 손가락이 시린데 발은 뜨끈뜨끈 녹아내리고 있다. 아무래도 만족스러운 간편 결제였던 것이 틀림없다. (전기료는 어차피 다음 달에 나오니까 이번 달은 모른 체하기 딱 좋다.)





나는 매일 달라지는 해의 뜨고 지는 시간이라든가 아침 서리의 모양이나 나의 지금 기분의 농도를 알아차리는 데 점점 더 민감해지고 있다. 참 좋은 변화이다. 문득, 서울을 떠날 즈음 내 몸에 여기저기 나도 모르게 들어있던 멍자국들이 생각난다. 무감각한 척했던 크고 작은 생채기들과 돌볼 틈 없이 바쁜 일상에서 스스로에 대해 애써 무지하기로 마음먹었던 많은 날들을 떠올려본다. 그에 비하면 나의 이 자라난 감각과 스스로에 대해 매일 조금씩 더 알아차려감은 그게 사소하거나 엄청나거나 상관없이 얼마나 대견한가. 다시 돌아온 추위에 어김없이 기름진 상투를 틀고 전기 온열 테이블 아래 앉은 내가 오늘 또 나에 대해 얼마나 많은 발견을 할까.


이렇게 추워지는 날 속에서 나를 탐구하는 일은, 인중을 한껏 오므려 시린 코 끝에 따뜻한 윗입술을 대보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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