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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 May 10. 2021

나의 베스트 모음집

잠깐의 행운과 긴 여운



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려고 할 때는 어정쩡한 하늘을 자주 보여준다. 우리가 봄바람, 봄비라고 부르는 것들. 어떤 날은 몸이 계절을 잊어 두꺼운 외투를 걸쳐 입고 밖을 나서면 겨드랑이나 무릎 뒤에 땀이 차다가 또 다음날은 미련 남은 겨울 날씨가 전기장판을 찾게 한다.


나는 이런 절기를 만나면 왠지 기분이 좀 어려진다. 순식간에 너무 덥거나 추운 계절로 넘어가는 것을 유예시키고 조금이라도 이 짧은 계절을 오래 들여다보기 위해 우리는 봄을 타고 가을을 타는 것이려나. 이런 날들엔 하릴없이 인간은 왜 태어나고 죽는지와 같은 궁금증도 생긴다. 서늘한 아침 번뜩 잠을 깨워 거울을 보며 내 몸에 새겨진 생의 의무를 더듬더듬 찾아보기도 한다. 간절기라는 이름을 쓴 철학의 계절. 날씨만큼이나 마음도 조증과 울증을 아슬하게 오가는 시간. 그래서 버릇처럼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하거나 발견해 내고, 몸으로 옮기면서 이 시간을 견뎌낸다. 가령 젖지 않고 하는 비 구경이라든가 아침에 바로 일어나지 않고 몇 번 고쳐 누우며 보내는 시간 같은 것들. 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찾고 있는 하루키의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 그러나 나는 좀 더 거대하고 희귀한, 그래서 행복이라기 보단 행운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이 계절을 잘 타고 넘어가 여름을 씩씩하게 맞이하기 위해.





당장 오늘 아침만 해도 벌써 행운을 마주했다. 이렇게나 시커멓게 타 버린 콩에서 이런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며 봉투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원두 포장을 아주 처음 뜯을 때만 맡을 수 있는 커피 내음. 나의 커피 소비 패턴으로 볼 때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맡을 수 있는 향이다. 오늘은 새 커피를 뜯었으니 운이 좋은 날.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건 역시, 목마름을 견디고 마시는 한낮의 맥주다. 처음 그 맛을 알아차려 버린 건 낯선 신사동 골목을 헤매고 헤매다 결국은 편의점에 들어갔을 때였다. 500ml 맥주를 사고 빨대를 얻어 꽂았다. 쭈우우우와압. 숨도 쉬지 않고 8월의 맹렬한 햇빛을 냅다 삼킨다. 그 청량함이 피보다 빠르게 몸을 휘휘 돈다. 이거지, 이거야. 길을 헤맨 보람을 찾아버린 것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가끔은 길을 잃는 것이 나쁘지 않다. 마침 근처에 슈퍼나 편의점이 있어 이런 행운을 마주하기만 한다면.


비가 올 것도 아니면서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의 정오에는 설렁탕을 먹는다. 지금은 시골에 있어 단골집에 가지 못하니 추억을 검색해 그곳을 간다. 그 집을 들어서기 50미터 전부터 꼬릿한 냄새가 폴폴 난다.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들 틈에서 파를 잔뜩 넣은 설렁탕을 입 안에 욱여넣고는 소주도 한 잔 마신다.



'300년 전부터 고아온 게 분명해!'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국물을 면사리 몇 가닥과 함께 한 번 더 삼키며 오늘이 흐린 날이라 무척 다행이라 생각한다. (떠올리다 보니 술은 꼭 껴 있네.)


만약 비가 내리더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창 가까이에 붙어 앉아 이소라 님의 <Track3>를 듣는다. 그럼 나는 비가 느리게 걷는 풍경을 볼 수 있다. 4분 18초가 영원처럼 느껴진다. 음악이 없다면 영화 <어바웃 타임>의 비 오는 날의 결혼식 장면을 떠올리기도 한다. 폭풍우를 맞는 주인공들의 미소가 먹구름 사이에 끼어 비치는 햇살 같다. 비 때문에 발이 젖는 건 너무 싫지만, 저렇게라면 손가락이 쭈글거릴 때까지 오래 비를 맞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겠다.


음악을 듣거나 뭔가를 떠올리는 것으로도 당최 행운을 발견하지 못하겠다면 나는 먹어보는 걸 자신 있게 추천한다. 무엇을 먹느냐고? 상관없다, 무엇을 먹느냐는! 만두를 먹어도 되고, 떡볶이를 먹어도 된다. 어떤 음식을 먹든 마요네즈에 간 마늘과 설탕을 섞어 만든 무적의 소스를 곁들이기만 하면 된다. 열량에 대한 죄책감은 잊고 소스를 드음뿌욱 찍어 먹어보면 앞으로 마요네즈의 열량이 얼마인가 하는 생각은 다시 하지 않게 된다.





나의 베스트 모음집은 이 밖에도 아직 한참이나 많다. 봄과 가을이 묻는 철학적 물음에 성실하게 답하기 위해 차곡차곡 준비해 둔 것들. 여름 그늘에서 듣는 윤종신 님의 9집 앨범이나 ‘찰스!’ 하고 부를 때 찰스의 갸웃거리는 고갯짓. <EBS 한국기행> 이금희 님의 내레이션과 스키 타는 스님의 모습이라든가 책을 빠르게 넘길 때 나는 종이 냄새 같은 것. 화창한 날의 선선한 바람을 타고 해파리처럼 공중으로 퍼지는 하얀 커튼도 좋다.

아,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이 흐른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나의 베스트 모음집. 만약 이 중 어떤 것들이라도 동시다발적으로 포개진다면 그 날 하루는 엄청난 행운이 찾아든 것이 틀림없다.



(혹시 지금 당신도 계절을 타고 있다면 그대만의 베스트 모음집을 떠올려 보길 바랍니다. 침이 흐를지도 모르니 손수건을 미리 준비해 두시고요.(웃음))





이렇게 멀리 떠나오니 그간 모르고 스쳐갔던 나의 일상 속 행운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내가 아끼는 것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사람들과도 한참을 멀어지니 마침내 기억이 나기도 한다. 나도 종종 누군가의 베스트 모음집에 속해있곤 했었다는 걸. 지금 내 일상은 잠깐의 행운과 긴 여운, 그 위에 놓여있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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