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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Jan 06. 2024

양의 마음

퇴고 없이 쓰는 글

탕후루 가게가 놀이터였을 무렵,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찾고 있었다.

눈이 시릴 때까지 가만히 한 곳을 바라보고 있으면 설핏 반짝이는 별들이 있었다.

먼저 말하는 법 없지만 말없이 제 길을 걸어가고 있는 하늘 위의 양 떼.

지금처럼 걸으면 우리도 언젠가는 양이 되겠구나. 그러니 그 순간을 위해 열심히 달려가자.

양이 되면 느리게 걸을 수 있으니까. 느리게 걸어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으니까.

근데 있잖아, 양이 되는 게 맞는 걸까?

집도 없는데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기만 하잖아.

양이 되고 생각하자.

그래, 그때는 초원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그때 생각하자.


분명 이십 년 전에는 서른을 기점으로 인생의 경사가 바뀐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되면 천천히 내리막길로 향해 굴러가는 일만 남았을 테지.

내가 좋아하는 손과 나를 닮은 손과 함께 미끄럼틀을 타는 거야.

힘들게 땅을 딛으며 오르지 않아도 나의 몸과 손과 이삿짐이 알아서 저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갈 테니 얼마나 편하겠어.


하지만 이십 년이 흐르자 서른도 이십 년만큼 굴러갔다.

뱃머리에 그어놓은 칼자국 아래에 아무것도 없었듯이 숫자 아래에는 그 어떤 경사도 없었다.

앞도 뒤도 오른쪽도 왼쪽도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는 우주와 같은 평평하고 무한한 공간만이 줄곧 거기 있었고 그러니 잃어버릴 것도 잃어버린 것도 없었다.

이별이 없으니 쓸쓸함도 없고 쓸쓸함이 없으니 돌아볼 일도 없다.

경사 없는 초원에 놓인 양의 마음을 상상한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나는 이별할 것이 없는데.


삼십 분만에 쉬어버린 목을 가다듬으며 노래방을 나서니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우산도 모자도 없이 하얀 눈을 잔뜩 맞은 우리는 솜털로 한가득 뒤덮인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조금씩 짧아지는 식사 시간 때문인지 예상보다 일찍 파했고, 눈발을 피하기 위해 역 안에서 이별했다.

함께 복권을 살까 했지만 그러면 희망도 실망도 세 배가 될 것이니 말을 아꼈다.

1등 복권에 당첨되면 눈썰매를 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위는 흰 점만 가득해서 앞을 분간할 수 없는데, 야속할 만큼 나는 길을 잘 찾았다.

마른풀을 씹듯 이미 지나온 길을 곱씹는다.

한 번도 나에게 없었던 사냥개의 얼굴을 상상한다.

경사 없는 눈밭 위에 발자국이 길게 길게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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