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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Jan 07. 2024

잠김쇠

퇴고 없이 쓰는 글

정상에 오르고 나서야 자물쇠를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너에게는 처음부터 정해진 번호가 있었다.

노력해도 영원히 바꿀 수 없다는 비밀번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포장을 뜯어버린 이후였고 잘려나간 플라스틱 모서리는 우는 척을 해 봐도 돌아오지 않았다.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잠글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너의 속이 훤히 보이니 잠겨도 열린 것과 같고 잠겨도 물 위에 뜬 것 같고. 우리는 잠기고 잠글 필요를 찾다 오늘을 기다리기로 했다.

아무도 열려고 하지 않으면 애써 바꾸지 않아도 볼트와 너트로 풀어헤치지 않아도 물 위로 올라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숨바꼭질처럼. 정상 위에 술래를 잠가 두고 우리끼리 저녁을 먹으러 가는 거야. 해 질 녘에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버리면 되는 거야.

그럼 아무도 열지 않은 채로 식어가겠지. 쇠는 무거우니까 풍경이 되고 싶을 거야.


서울에는 인공 섬도 있고 인공 눈물도 있고 인공 화석도 있습니다.

관광객들은 오래된 지층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오늘을 박제했다.


진열대에는 하트 모양의 크고 작은 자물쇠가 가득했다.

언젠가 모두 철창 위에 매달릴 운명이라는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펜으로 글씨를 쓰고 날짜와 이름을 적고 열쇠로 손잡이를 열고 다시 동시에 잠갔다.

돈을 주고 새를 사서 날려 보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오니 처음부터 계속 같은 비밀번호인 네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오늘 만나자마자 헤어지고 왔어.

마음을 준 적이 없으니 아쉬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 너를 떠나보낼 일이 있을까. 너를 잠가 두고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어딘가에 울고 있는 너를 찾아 눈 덮인 산비탈을 넘어지고 구르며 내려올 것 같은 기분.

그 어느 곳에서도 잠기지 않는 날개 없는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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