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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Jan 21. 2024

섬은 준비하지 않는다

퇴고 없이 쓰는 글

아이를 낳았고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이는 누워 있고 걷지 않았다

눈이 오고 있었고 녹찻빛 단칸방에서 나는 말을 고르고 있었다

기다려도 말이 나오지 않았고 초조한 마음에 자리를 뛰쳐나왔다


섬의 주민들은 염화칼슘을 뿌리지 않는다

눈이 녹을 때까지 그저 기다린다

가끔 옆으로 눈을 쓸거나 치워두기는 하지만 없애지는 않는다

눈은 주민들의 가장 오래된 가족이다

섬의 주민들은 봄을 준비하지 않는다

눈이 다 녹으면 봄이라고 부른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음으로써 다음 계절을 맞이한다


길을 만들기 위해 먼저 기둥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기둥이 있어야 지붕이 있고 길에 눈이 쌓이지 않으니

사람들은 미끄러운 길을 좋아하지 않을 테니

하지만 안전한 길을 만들기 위한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눈은 사방에서 불어닥친다 우산은 눈보라 앞에서 춤만 춘다

또 눈은 쉬지 않고 온다 아쉬움을 싫어하고 반가움만 찾는 사촌동생처럼


걸어 다닐 수만 있으면 그것은 길이다

길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것이다

준비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 생겨나고 또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눈 아래 묻힌 길을 아쉬워하지 않듯 다시 나타나는 길을 반가워하지도 않는다

계절은 흘러가고 물은 녹고 얼기를 반복한다


손수건을 흔들며 인사말을 고른다

사요나라, 이건 오래 보지 않을 것 같을 때 하는 인사야

마타네, 이건 곧 볼 수 있을 것 같을 때 하는 인사고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겠지만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창문 덮개를 잠시 내려둔 채 눈구름을 뒤로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기다리다 보면, 아니 기다림을 잊고 살아가다 보면 어느덧 길이 생겨 있다

우리는 봄을 찾지 않고 발견한다

눈 아래 숨은 길이 천천히 나타날 것이다


사요나라, 마타네

아이에게 건네지 못한 인사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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