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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Sep 06. 2019

인생은 설탕 덩어리-이파네마 해변을 거닐며...

브라질-리우데자네이루-이파네마 해변

인생은 설탕 덩어리...


코르코바도 언덕은 다시 짙은 안개로 뒤덮였다. 안개가 언제 벗겨 질지 기약이 없다.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어 우리는 일단 산악열차를 타고 언덕 밑으로 내려와 팡데아수카르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40대로 보이는 인상이 좋아 보이는 택시운전사가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팡데아수카르."

"팡데아수카르. 오케이! 라이프 이즈 슈가로프!(인생은 설탕 덩어리)”


운전수는 시를 읊는 듯 흥얼거리며 백미러로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인생은 설탕 덩어리라고 뇌까리는 그는 아주 낙천적인 모습이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운전을 하던 그는 팡데아수카르로 오르는 케이블 카 정류장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엔조이 슈가로프! 라이프 이즈 슈가로프!"

"하하, 고맙소. 라이프 이즈 슈가로프!"


내가 웃으며 그의 말을 따라 하자 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면서 사라져 갔다. 인생은 설탕 덩어리라고 흥얼거리며 사라지는 그의 모습이 매우 여유가 있어 보였다. 우리는 텔레페리코라고 부르는 75인승 케이블카를 타고 팡데아수카르(Pao de Acucar, Sugarlofe Mountain, 396m)에 올랐다. 팡데아수카르는 바다 위에 툭 튀어 오른 바위가 마치 정제하여 농축을 시킨 제빵용 '설탕 덩어리(Sugar Loaf)'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택시 운전사가 "인생은 설탕 덩어리"라고 중얼거렸던 것은 팡데아수카르를 두고 한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007 문레이커'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바라보는 슈가로프는 타원형의 럭비공을 연상케 했다. 서울 북한산의 인수봉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슈가로프 아래로 하얀 설탕 같은 해변이 끝 간 데 없이 이어졌다. 고급 리조트들이 발아래 호화롭게 들어서 있었다. 


럭비공처럼 생긴 팡데아수카르


"인생은 설탕 덩어리…"


그 운전수의 말이 바람결에 흘러갔다. 슈가로프 정상에 서서 리우 시내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가 말한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설탕 덩어리처럼 살아가는 카리오카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말이다.  영화 '카니발의 아침(Manaha De Carnaval)'이란 보사노바 가사는 카리오카들의 삶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60년대 재즈 팬을 사로잡았던 아수투르드 질베르토(Astrud Gilberto)가 시를 읊조리듯 속삭이는  이 노래는 마치 설탕처럼 달콤하게 들린다. 이 노래는 영화 '흑인 오르페(카니발의 아침)'의 주제곡이기도 하다.


내게 다가온 행복한 하루의

너무나 아름다운 아침.

태양과 하늘은 높이 솟아올라

온갖 색채로 빛났네.

그리고 꿈이 내 마음으로 돌아왔네.

이 행복한 하루가 끝나면

어떤 날이 올지 몰라.

우리들의 아침에 너무나 아름다운 끝.

카니발의 아침.

기쁨이 되돌아와

내 마음은 노래하네.

너무나 행복한 이 사랑의 아침      -영화 ‘카니발의 아침’ 중에서-     


팡데아수카르에서 바라본 코파카바나 해변


슈가로프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코파카바나 해변으로 걸어갔다. 다양한 인종,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흰 설탕 같은 해변의 모래사장에 누워 있었다. 머리 위로 햇볕이 눈부시게 내리쪼이고 있었다. 터질 듯 탄탄한 몸매, 실오라기 같은 비키니, 손바닥만 한 천 조각으로 아슬아슬하게 요소를 가린 여인들이 하얀 설탕 같은 모래사장에 누워 몸을 좌우로 천천히 돌리면서 생선을 굽듯 살갗을 그을리고 있었다. 그녀들은 천천히 일어나 부서지는 파도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얀 모래가 온몸에 묻어 있는 그녀들의 몸뚱이는 마치 하얀 설탕 덩어리처럼 보였다. 


"인생은 설탕 덩어리."


운전수가 읊조린 것처럼 그녀들의 몸짓은 정말로 설탕 덩어리처럼 보였다. 맨발로 모래사장을 걸어가는 나는 뭔가에 단단히 홀린 느낌이었다. 가늘디가는 하얀 설탕 모래가 발가락을 간질이며 빠져나갔다. 해변의 물은 차지 않았다. 몸이 나른해지고 어딘가 눕고만 싶었다. 아마 나를 간질이고 나른하게 만드는 건 모래가 아니라 폭죽처럼 곧 터질 것만 같은 저 여인네들의 관능적인 몸매일 게다. 그래 눕자. 모래사장에 벌렁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내는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하늘과 바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권총강도들이 설치는 리우의 해변에서 '털릴 것이 없는 자유'를 나는 만끽하고 있었다. 이미 리마에서 도둑을 맡고, 라파스에서 강도를 만났던 나는 더 이상 털릴 것도, 털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가난한 카리오카들처럼 내 주머니에는 고작 몇십 달러의 지폐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여보, 그만 일어나요."

"응? 난 이곳이 좋은 데?"

"난 그만 숙소에 들어가서 쉬고 싶어요."


아내의 재촉에 설탕 같은 모래를 털고 일어났다. 해변엔 어느 시인의 동상이 외롭게 벤치에 앉아 있었다. 마침 그곳에 앉아 있는 카리오카 가족이 앉아 있었다. 소녀의 모습이 너무 앙증맞고 귀여웠다. 몇 백 년을 지나오며 피를 섞이고 섞여온 혼혈의 소녀. 저 소녀도 머지않아 아름다운 설탕 덩어리가 되겠지. 인생은 설탕 덩어리야. 

         

코파카바나 해변 시인의 동상 앞에서


이파네마 소녀에게 사랑에 빠진 톰 조빔    


"아니, 또 해변을 가요?"

"응, 그곳엔 아름다운 정원과 이파네마 해변이 있어요."

"아름다운 정원?"


정원이란 말에 아내는 귀가 번쩍 뜨이는 모양이었다. 이파네마 해변은 코파카바나 해변과 이어져있지만 너무 멀어서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이파네마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여보세요. 한국인 아니신가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들어 보는 한국말에 나와 아내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니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키가 큰 중년 남자가 웃으며 다가왔다. 


“한국인 맞으시죠?”

“네‘ 그렇습니다. 선생님도 한국인이시군요.”

“네, 저는 리오에서 살고 있는 교포입니다.”

“아, 그러세요? 그런데 어떻게 한국인인 줄 알았지요? “

“한국인들의 특징은 대부분 모자를 쓰고 다니거든요. 거기에다가 여성분들은 양산을 쓰는 경우가 많고요. 두 분 모습이 한국인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두 분 다 모자를 쓰고 있어서 한국인이라고 확신을 했지요. 그런데 두 분만 이렇게 여행을 다니세요?”

“네 그렇습니다. 저희는 지금 세계일주 여행 중에 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패키지로 오는 한국인들은 많이 보지만 선생님 연세에 두 분만 배낭여행을 다니시는 분을 처음 봅니다. 너무 반가워서 불렀는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커피 한잔 대접하고 쉽습니다만.”

“좋지요.”     


우리는 생면부지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아주 오래전에 알았던 친구처럼 그가 이끄는 찻집으로 들어갔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는 원래 태권도 사범으로 브라질에 왔다가 브라질이 좋아 이곳에 눌러앉게 되었다고 했다. 허지만 늘 고국이 그립고 고국 사람을 만나면 반갑다고 했다. 나라 밖을 떠나면 애국자가 된다고 했는데 그가 바로 한국을 사랑하는 애국자였다.   

    

“리오엔 언제까지 머물실 건가요?”

“저희 내일 이스터 섬으로 떠납니다.”

“아, 이스터 섬이요? 남미에 몇십 년 살면서도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지요. 좀 더 머물다 가시면 저희 집에도 초대를 좀 하고 싶은데 아쉽군요.”

“아이고 말씀만 들어도 감사합니다.”

“오늘은 어디로 가실 건가요?”

“이파네마 해변으로 가려고 합니다.”

“아주 멋진 곳이지요. 이파네마 해변에 가시면 레스토랑 ‘고로타 데 이파네마’를 꼭 들려보세요. 보사노바의 아버지 톰 조빔이 자주 들렸던 곳입니다. 그는 그 카페에서 영감을 얻어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란 유명한 보사노바를 작곡을 하기도 했지요.”

“네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꼭 들리려던 참이었어요.”

“그리고 브라질 리오는 치안이 썩 좋지 않습니다. 배낭을 꼭 앞쪽으로 메고 다니시고 소매치기와 강도를 조심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을 백 사범이라고 밝히는 그는 이파네마 해변으로 가는 버스를 자세히 알려 주었다. 고마운 한국인! 라파스에서는 강도를 맞고 잉카식당의 주인인 한국인을 만나 맛있는 스테이크를 대접받았는데, 리오에서는 자랑스러운 한국인 태권도 사범으로부터 커피까지 대접을 받았다. 우리는 그와 헤어져 이파네마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한 모퉁이를 돌자 곧 해변이 나왔다. 꾸밈없고 건강한 처녀 같은 해변이다. 코파카바나 해변에 비해 한적하지만 주변에는 고급 주택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파네마 해변


코파카바나가 관광객들의 해변이라면 이파네마는 리우 인들의 해변이다. 훨씬 한적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이파네마는 레브롱, 상콘라두 해안과 길게 이어져 있다. 백사장의 끝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곳엔 브라질의 한 천재 음악가 톰 조빔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있다. 파도처럼 속삭이며 흐느끼는 보사노바의 물결 속에 진한 커피 향처럼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새로운 물결'이란 뜻을 가진 보사노바는 삼바의 토속적인 리듬에 재즈를 접목시킨 음악이다. 


흔히 '톰 조빔(Tom Jobim'이라고 불리는 안토니오 카를로스는 '보사노바 아버지'로 불릴 만큼 60년대를 풍미한 뮤지션이다. 톰 조빔은 이 해변에서 열아홉 살 난 아리따운 동네 처녀를 만나 짝사랑에 빠지고 만다. 유부남인 조빔은 이파네마의 카페에서 늘 열아홉 미녀를 기다렸다. 사랑에 빠진 조빔이 친구이자 시인인 모라이스에게 짝사랑의 사연을 이야기하자, 모라이스는 즉석에서 조빔의 사랑이야기를 시로 옮겼다. 그리고 조빔은 열아홉 소녀에게서 영감을 받아 모라이스의 시에 곡을 붙였다. 그래미상까지 받게 된 그 유명한 보사노바 '이파네마의 소녀(The Girl Grom Ipanema)'는 이렇게 탄생되었다.  

    

키 크고, 까무잡잡하고, 젊고 사랑스러운 

이파네마에서 온 여인이 산책을 가네. 

그녀가 옆을 지나가면 모두들 '아~' 하고 감탄하네.

그녀가 걷는 것은 마치 삼바 춤을 추는 듯하고

멋지게 팔을 흔들고, 한들한들 걸어가네…….

-톰 조빔의 ‘이파네마의 처녀’ 중에서-     


우리는 '레스토랑 이파네마(Garota de Ipanema) '이란 간판이 걸려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때마침 '이파네마의 소녀'란 노래가 진한 커피 향을 타고 실내에 퍼져 나오고 있었다. 카페의 벽에는 조빔의 사진과 악보, 기사들이 붙어 있었다. 유부남이던 조빔은 이 동네 열아홉 살 처녀를 짝사랑해 그녀를 훔쳐보려고 매일 이 카페에 왔다고 한다. 


이파네마 레스토랑


"아이고, 커피가 너무 독해요?"

"그러니까 커피 향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마시야지요." 


커피 향과 보사노바. 브라질 사람들은 끈적끈적하고 진한 커피를 즐긴다. 3분의 1쯤 진한 커피를 잔에 넣고 설탕을 듬뿍 넣어 입술 끝으로 홀짝거리며 커피 향을 느끼면서 천천히 마신다. 


보사노바는 삼바와 재즈의 혼혈아라고 한다. 짙은 커피 향 같은 보사노바는 브라질의 상류층들이 즐겨 듣는 음악이다. 카페에서 나온 우리는 호수를 산책을 했다. 언덕 위에 그리스도 상이 안갯속에서 막 벗어나고 있었다. 우리는 이파네마 해변에서 가까운 식물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리우 데 자네이루 식물원(Jardim Botanico do Rio de Janeiro) 울창하고 거대한 나무들로 숲을 이루고 있었다. 8천여 종의 열대 나무들이 자라나고 있다는 브라질 최대의 식물원이다. 하늘을 찌르는 제왕야자나무가 도열하여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야자나무 가로수 길을 걸어갔다. 


리우데자네이루 식물원


"이 나무들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하하, 녀석들이 당신을 환영하며 도열하고 있군요."


야자나무 가로수 길을 걷다 보면 파우페로(Pua Ferro-철의 나무)라는 진기한 나무도 있다. 너무 단단하고 무거워서 가지조차 물에 뜨지 않는다는 나무다. 파우브라질(Pau Brasil)이란 나무도 있는데 브라질이란 국명은 이 나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오늘 산림욕 한번 제대로 하네요."

"저기, 이파네마의 처녀들처럼 벌거벗고 삼림욕을 해야 제대로 하는 거지요."

"어? 정말 벌거벗은 여자들이네요."

"자연과 가장 친한 인간적인 모습이 아니겠소?"


앙리 마티스의 춤 동상


공원 입구에는 앙리 마티스(1869~1954 프랑스 화가)의 '춤(Dance)'을 모방한 나체 동상들이 역동적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식물원 잔디 위에 벌거벗은 채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율동적인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이 작품은 우리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보았던 그림이다. 앙리는 이 그림을 통해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신적인 것이요, 가장 신적인 것이 가장 인간적인 것”이란 견해를 표현했다. 


모두가 이파네마의 아름다운 소녀들처럼 보였다. 식물원을 거닐다 보니 문득 아담과 이브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들기도 했다. 자연에서 돌아와 자연의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식물원은 하루 삼림욕을 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다. 식물원 한쪽에는 한 떼의 남녀가 어울려 기체조를 하고 있었다. 신성한 정원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 싱그럽게 보였다. 우리는 그들의 체조를 따라 하다가 공원을 나왔다.


식물원에서 기체조를 하고 있는 사람들


리우데자네이루는 여행자들의 심장을 뜨겁게 해주는 곳이다. 리우 도착하여 폭죽처럼 곧 터질 것만 같은 해변의 여인들을 바라보노라면 당신의 심장은 저절로 뜨겁게 달구어지고 말 것이다. 키 크고 검게 탄, 어리고 사랑스러운, 이파네마의 여인을 바라보노라면 누군들 심장이 뜨거워지지 않겠는가.


내일이면 브라질을 떠난다. 아름다운 이파네마의 소녀들도, 코파카바나 해변도, 언덕 위의 그리스도 상도 내일이면 굿바이다. 남미의 자연은 아직 가공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니다. 때 묻지 않은 자연. 톰 조빔이 말한 것처럼 자연이 있기에 세상은 정말 살만한 곳이다.   

   

무언가 이해를 하려면 먼저 그것을 사랑해야 한다. 

산, 나무, 바다, 새 등 자연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음악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삶은 아름답다. 

그리고 세상은 살 만하다. -톰 조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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