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도 끝도 없는 인생길

나는 아직 나의 밤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by 찰라


어느덧 팔순,
아내의 숨소리가 세상을 채우는 유일한 시계가 되었습니다.
낯선 이국의 길 위에서 읽었던 아니 에르노의 밤이
이제는 나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오래전, 프랑스의 낯선 길 위에서 아니 에르노의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를 읽었습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며 그 쇠락의 과정을 칼날 같은 문장으로 기록한 작가의 심정은, 당시 여행자였던 제게는 그저 고통스러운 타인의 기록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참으로 묘한 복선을 숨겨두는 법인가 봅니다. 팔순을 넘긴 지금, 저는 요양병원이라는 고립된 섬에서 아내의 곁을 24시간 지키며, 구구절절 가슴을 후벼 파는 아니의 그 책을 다시 펼쳐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마른 손을 잡고 있으면, 저 역시 작가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작가 아니의 나이와 나는 동시대를 걷는 팔순이기에 그녀의 글은 더욱 공감을 일으킵니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작가의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신 1983년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신 1986년까지의 시간을 기록 간병일기입니다. 이 책은 그녀의 또 다른 어머니에 대한 책 <한 여자>와 같은 시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성격과 결은 사뭇 다른 독특한 작품입니다.


<한 여자>가 어머니의 요양원에서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일생을 사회학적으로 복원한 정제된 회고록이라면,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간병과정에서 겪은 처절하고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나는 최근 그녀의 책 두 권을 동병상련의 느낌으로 다시 펼쳐 들고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밤새 아내의 가느다란 숨소리를 시계추 삼아 밤을 지새우고 나면, 낮 동안 짧은 틈을 내어 병원 앞 하남 풍산 숲길을 걷습니다. 하염없이 걷다 보면 문득 깨닫습니다. 인생이란 참으로 시작도 끝도 없는 길이라는 것을요.


나는 중년의 나이에 모든 것을 접어두고, 난치병 아내와 배낭 하나 메고 세계를 누비던 그 길도 인생이었고, 지금 아내의 휠체어를 밀며 요양병원 복도를 도는 이 길도 결국 같은 인생의 연장선이었습니다.


굽이굽이 휘어진 숲길을 걸으며 저는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홀로 걷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다고 말입니다.



육신은 비록 병실에 매여 있으나, 우리의 영혼은 이 숲길의 바람처럼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작년 늦가을부터 걸었던 숲길은 추운 삭풍의 겨울을 지나 어느덧 산수유 움트는 봄이 되었습니다. 숲길에는 차가운 눈 대신 봄의 전령 노란 산수유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며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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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팔순의 나이에 아내를 수발하는 저를 보며 '수행자' 같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이 시간은 고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숙제이자, 생의 가장 정직한 문장입니다. 30년 병마와 싸워온 아내, 2년 전 뇌출혈로 쓰러진 후 이제는 제 손길 없이는 단 한순간도 버틸 수 없는 나의 사람. 그 사람을 지키는 일은 이제 제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이 언제 어디서 끝을 맺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이 있습니다. 길은 끝나도 우리가 새긴 발자국은 남듯이, 우리의 육신이 멈추는 곳에서도 우리의 사랑만큼은 영원하리라는 믿음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이 더 또렷해지듯, 아내를 향한 저의 간병은 이제 투쟁을 넘어 간절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비록 몸은 고단하고 이 밤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저는 오늘도 아내의 잠든 얼굴 위로 나지막한 고백을 얹어둡니다.


"여보, 나는 당신과 함께하는 나의 밤을 절대 떠나지 않겠소. 우리가 걷는 이 길 끝에 무엇이 있든, 끝까지 당신 손을 놓지 않겠소."





* 작가의 한마디 : 팔순의 나이, 요양병원이라는 고립된 섬에서 아내를 간병하며 깨닫습니다. 우리의 길은 끝나가고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함께 걷는 이 걸음의 의미는 영원할 것임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