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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May 14. 2024

양귀자, 모순

 양귀자 작가는 구수한 토속어 마술사다. 모든 문장에  할머니가 양은 냄비에 끓인 된장국 냄새가 난다. 가마솥에서 끓인 구수한 숭늉맛이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끼가 낱말 하나하나에, 문장 하나하나에 태연하게 베어 있다. 그 누구도 감히 흉내 내지 못할 그녀만의 현란한 문장으로 독자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故 박완서 작가를 진하게 닮았다. 문체로는 문장의 고저와 장단, 운율과 가락, 구수한 향토어, 착 감기어 오는 낱말이 빼어나게 닮았고, 콘텐츠로는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는 민생 생존 에너지, 민초의 속살, 끈질긴 삶의 애증이  동일한 질감이다. 단번에 빠져들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꾸준히, 때로는 드문드문 메모했다. 요즘에는 책 제목과 작가만 메모하고 내용은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책을 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열정이 예전만큼 못했다. 소설  「모순」은 이러한 나의 게으름을 통째로 앗아갔다. 


 나의 메모는 두 가지다. 하나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책 주제문을  발췌하고, 나머지 하나는 구수한 토속어를 채집한다. 잘 표현한 구수한 토속어는 글의 품격을 높이기 때문이다. 소설 「모순」에서 채집한 나만의 토속어, 같잖을 수밖에, 얕봤다, 터럭만큼, 까먹기도, 구김살 없는 이따위 맛깔난 낱말이 숱하게 깔려있다. 작가는 작가 노트에서 ‘소설 뒤나 앞에서 반드시 쓰이거나 쓰였어야  할 문장들이 저 혼자 뚜벅뚜벅 머릿속을 걸어 다니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럴 때, 결단코 그 문장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문장은 작가인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나 말고 누군가가, 오직 소설을 위해 아껴둔 한 말씀을 섬광처럼 발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옆길로 좀 더 새보자. 

'나도 세월 따라 살았다. 살아봐야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아직 나는 모순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받아 들 일 수 있다. 삶과 죽음은 결국 한통속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P292)'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생뚱맞지만 고 노무현 대통령 유서가 떠올랐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지난날 수백 번 되뇌었던 이 문장 말이다. 그런데  ‘삶과 죽음은 한통속이다’라고 말을 하니, 어찌 짜릿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작가 통찰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뿐이다.


 25살 결혼 적령기 주인공 안진진, 그녀는 일란성쌍둥이 엄마와 이모를 일상생활에서 함께한다. 엄마와 이모는 결혼하면서, 상반된 삶을 살아간다. ‘너희 엄마는 평생 바빴지, 새벽부터 저녁까지 돈도 벌어야 하고, 무능한 남편과 싸움도 해야 하고, 말을 안 듣고 내빼는 자식들 찾아다니며 두들겨 패야 했고, 언제나 바람이 씽씽 일도록 바쁘게 살아야 했지(P.283)’,  반면에 이모는 ‘어려서도 평탄했고 자라서도 평탄했으며,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이후에는 더욱 평탄해서 도무지 결핍이라곤 경험하지 못하는’(p.283) 삶을 살아간다. 이모는 스스로 칭하기를 '무덤 속 같은 평온'한 생활이라 말한다. 안진진은 생활전선에서 억척스럽게 일하는 엄마보다는 이모와 정서적으로 더 많은 공감을 나눈다. 첫눈 오는 날 이모와 데이트를 하고 다음날 귀여운 이모, 예쁜 이모와 안부전화를 하곤 한다.   


 안진진에게는 두 명의 남자 친구가 있다. 이모부를 닮은 나영규, 모든 일상을 계획에 맞추어 생활한다. 데이트할 때, 나영규는 철저하게 준비한다. 영화표를 예약하고, 커피 마실 근사한 카페를 정하고 시간에 맞추어 행동한다. 계획에 어긋나는 걸 못 견디어하는 타입이다. ‘정시에 출발하고 정시에 도착하기 위해서 애쓰는 기차를 멈추게 하지는 못하였다(p291).’ 그의 태도를 잘 규정해 주는 말이다. 안진진은 이런 남자 친구를 싫어하지 않고 고마움을 느낀다. 또 다른 남자 친구는 김장우다. 아버지를 닮았다. 사진작가로 꽃을 찍으면서 생활을 하고 있다. 영화표를 예약하지 않고 데이트 코스를 미리 정하지 않는다. 안진진이 주도하는 데로 따라간다. 그는 ‘삶의 비밀은 그 보편적인 길에 더 많이 묻혀있을 거야(p218)’라는 속내를 지닌 안진진에게 무척이나 어울리는 사람이다. 안진진은 김장우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러던 와중 이모가 이 세상과 이별을 한다. ‘나는 늘 지루했어, 그래서 그만 끝낼까 해’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이모는 죽음으로 내게 가르쳐 주었다(p295).’


 안진진은 김장우가 아닌 나영규를 반려자로 선택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다. 이전에도 없었고, 김장우와 결혼하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한 그것, 그것을 나는 나영규에게서 구하기로 결심했다.'


 모순이다.

 작가는 작가 노트에서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다. 풍요를 들추면 빈곤이 있기 마련이며, 삶과 죽음은 반대어이지만 공존하고 정신과 육체는 상반되지만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다고 반추한다. 이 교착 지점에서 모순이라는 소설이 탄생됐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p296) 


  양귀자는 한국이 낳은 보물 같은 구수한 토속어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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