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어른들의 선한 영향력을 소설에 담아내고자 했다고 말한다. 따뜻한 소설이다. 사람이 사람의 길로 접어들도록 인도한다.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다.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이 날마다 순서도 질서도 없이 점을 찍어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이 우연으로 이어져 선이 된다. 그 선은 그 누군가에게 삶의 구원자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이 소설은 편의점을 운영하는 염 여사 단 한 사람 기점에서 어진 덕행이 출발하여 노숙자 독고에게 전해지고, 취준생 시현이에게 전달되어, 우리네 사회는 아직은 '살아 볼 만한 세상'이라고 말한다. 소설이 우리네 일상에서 생동감 넘치게 발하는 지점이다. 문체는 새싹처럼 생기가 넘쳤으며 낱말에도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처럼 구수한 냄새가 풍겼다. 콘텐츠 또한 파도의 물거품이 부서지듯 자연스러웠다.
문체네 콘텐츠니 이렇게 주제넘은 말을 하는 이유가 있다. 며칠 전 최근에 발표된 베스트셀러 소설 두 권을 읽었다. 소설을 읽고 서평을 써야지라는 생각했는데, 한 권은 중간쯤 읽고 그만 책을 덮었다. 하와이에서 할머니 제사를 지내는 내용인데 읽기가 많이 불편했다.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도통 그 내용이 와닿지 않았다. 다른 소설도 콘텐츠가 비슷한 증조할머니 이야기였다. 주인공과 할머니가 만나는 장면이 너무 억지스러워 매우 불편했다. 완독했지만 불편하고 찝찝했다. 나만 이렇게 느끼나 싶어 혼란스럽다. 유시민 작가는 세계고전 명작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난 뒤, 저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며, 자신과 결이 맞지 않다고 했다. 아무리 뛰어난 명작이라도 개개인의 성향과 취향에 따라 다르며 굳이 맞출 필요도 없다고 했다. 나를 위로해 보지만 그 찜찜함은 가시지 않는다.
결국 삶은 관계였고 관계는 소통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 있음을 이제 깨달았다(p252).
이 소설 기저에 깔린 주제다. 서울역 노숙자 독고 씨, 그는 말을 더듬는다. 덩치가 크며, 성인 남성 두 명을 힘으로 너끈히 제압할 수 있다. 그는 술로 자신의 과거 이력을 깡그리 뭉개버렸다. 독고는 편의점 주인 염 여사를 우연히 만나 야간 근무 직원으로 채용된다. 염 여사는 교사 연금으로 자기 몸 하나 건사하고 살 수 있었다(p33). 염 여사는 편의점으로 돈을 왕창 벌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매출이 줄어 망한다면 직원들이 갈 곳이 없어지는 것이 걱정될 뿐이다. 하지만 이토록 경쟁이 심한 줄은 몰랐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줄도 알 수 없었다(p34).
노숙자 신세였던 독고가 따뜻한 편의점에서 겨울밤을 보내는 것은 온전히 염 여사 덕분이었다. 독고는 동네에서 유일한 휴식처인 편의점 앞 야외 테이블을 매일 청소하고, 매점 관물대에 물건을 가지런히 진열했다. 동네 할머니에게는 편의점 물건을 집으로 배달해 주었으며,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서 참참참(참께라면, 참치김밥, 참이슬)으로 술 먹는 손님에게 온풍기를 가져다 콘센트에 꽂아주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성실하며,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독고는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아르바이트생 시현이, 남편은 집을 나갔고 아들과 함께 사는 주간 근무자 오선숙, 그들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종국에는 선한 영향을 준다. 쌍둥이 두 아들, 아내와 함께 살면서 퇴근길에 혼술 하는 이웃 직장인 경만 씨. 새벽에 동네에서 유일하게 불이 커진 편의점 앞 빌라 2층 극작가 인경 작업실. 염 여사의 아들, 그 아들의 의뢰를 받고 독고의 과거를 캐내는 흥신소 곽 씨, 우연이든 필연이든 서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사람 관계를 저자는 소중한 인연으로 만들어 낸다. 이 소설을 통하여 어른들의 선한 덕행이 사회의 자생적 구조로 자리매김하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란다.
책을 접으니 문득 안도현 쓴 퇴근길 시가 영화 엔딩 자막처럼 떠오른다. 이 시는 단 두 줄이다.
퇴근길 안도현
삼겹살에 소주 한잔 없다면
아, 이것마저 없으면
지친 하루 끄트머리에서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권한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