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적인 단어를 고찰하는 건,
곧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형이하와 형이상,
형태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는다.
형이하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이다.
컵은 컵이어서, 책상은 책상이어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형이상, 형태가 없는 것들…
가족, 사랑, 자유, 지혜 같은 단어들이 그렇다.
겉보기엔 단순하고 명료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기억과 감정들이
어디에선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내가 단 한 번도 풀어본 적 없는,
감정의 매듭들처럼.
이 단어들은 어린 시절부터 내 안에 쌓여온 것들이다.
우리는 모두 이 단어들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간다.
익숙한 단어들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나를 어떻게 형성해 왔는지 자각하는 순간,
이 단어들이 새롭게 다가오며
생명력을 가진 듯 느껴진다.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단어들을 꺼내어
하나하나 바라보는 과정을 통해
나는 나의 진짜 모습을 찾아가게 된다.
이 단어들은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결과물이다. 어린 시절의 감정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나에게 새겨졌고, 그때의 관점은 지금의 나에게도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 가령, 어린 시절의 ‘가족’은 보호와 안전의 상징이었다. 가족은 세상이 무섭고 혼란스러울 때 안심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가족은 책임과 이해, 때로는 서로를 지켜주려는 의지로 다시 다가온다. 때로는 서로를 지켜주려는 무언의 다짐으로 다가온다.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사랑’ 역시 그러하다. 어린 시절의 사랑은 그저 헌신과 지지였다. 어린 내가 그저 울기만 해도 안아주던 엄마의 그 무조건적인 따뜻함이 내게 사랑의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제 사랑은 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고, 부족함마저도 존중하는 깊은 감정으로 변해 있다. 과거의 사랑이 조건 없는 위로였다면, 지금의 사랑은 부족함을 인정하는 성숙한 감정이 되었다. 그 차이를 이해하게 된 것도, 나와 함께 사랑이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성인이 되어 나는 이 단어들을 다시 들여다보며 새로운 의미를 찾아간다. 어린 시절의 순수한 감정에 기대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내가 직접 정립한 단어들이 내게 뿌리가 되어 준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단어들을 꺼내어, 새롭게 정의할 때마다 나는 그 안에서 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어쩌면 내가 알고 싶었던 나의 모습은 이런 단어들 속에 조용히 숨겨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형이상학적 단어들을 꺼내어
새롭게 정의하는 것은
단순한 언어의 재구성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이해하고,
나의 중심을 다져가는 여정이다.
오랜 시간 무의식 속에 묻어두었던
단어들을 하나씩 밝혀가며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나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나를 이루는 중심이 되는 뿌리를 세워간다.
이 단어들이 나를 이루는 중심이 되듯,
당신에게도 그러하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너에게 친구란 어떤 거야?"
"너에게 가족이란 어떤 거야?"
"너에게 돈이란 어떤 거야?"
그들의 대답을 통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조금씩 알아간다.
추측하거나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물어본다.
그렇게 너를 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