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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찬집 Nov 07. 2018

늙음의 미학

늙어 간다는 것

얼마 전 라디오를 듣다보니 클래식 음악 소식코너에서다. 헨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아흔이 다된 바이올리니스트가 건제하다는 반가운 소시이다. 임 고인이 되었으리라고 지레짐작을 하고 있던 터라 반가운 마음 이전에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오래전에 영화를 본 생각이 난다. <장지오 감독, “나무를 심는 사람”에서 <이십대가 보는 오십대란 할 일은 죽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주인공의 내레이션에 펄펄뛰며 분개했던 것은 가맣게 잊어버린 채  나 역시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성급한 일반화의 불경스러운 오류를 여러 번 90넘은 분에게 범했기 때문이다. 

90대 넘은 노(老) 전문가들이 열정을 보며 나보다 나이가 많은 전문가들을 열정의 소멸내지는 부재의 시기로 정의 내리고 있던 내 편견은 너무나 충격적인 쇼크였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안하던 20대 시절 나는 시간이 흘쩍흘쩍 흘러서 빨리 나이가 들기를 바랐다. 

나이가 많아지면 풍부한 경험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넓어지고 지혜가 샘솟듯  솟아나서 인생살이, 세상살이에 대한 고민이 눈 녹듯, 금세 사라져 없어  질 것만 같아서였다.

속담을 보편적인 진리의 집약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나이와 함께 지혜가 온다”는 속담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이립(而立),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이순(耳順)의 단계를 거치며 지혜와 인격을 갖춘 완성 인간이 될 것으로 기대 했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 가면서 이런 기대는 착각내지 환상이었음이 드러났다. 나이와 함께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내 삶의 여정을 인도해줄 지혜라는 가이드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삶은 여전히 낮선 여행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불안한 마음으로 두리번거리며 혼자. 혹은 다른 사람들이나 책의 도움을 받으며 길을 찾아야 했다. 또한 안목이 넓어져서 너그러워 지기는커녕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편협함에서 나오지 못했다. 

나이 들면서 그저 열정이 조금씩 사라질 뿐이었다. 모든 것을 바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하고 싶은 일들의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조금씩 사라질 뿐이었다. 꼭 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도도 줄어 들렀다. 이십 대에는 당장 해치우지  않으면 숨 너머 갈 것처럼 긴급하고 절박 했던 일들이 이제는 숨 한번 크게 들이 쉬면서생각해 보면 굳이 하지 않아도 참고 넘어 갈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나이와 함께 지혜는 오지 않고, 열정이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절감하면서 난ㄴ 늘음이 아주 슬픈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것에도 미혹 되지 않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은 불혹의 상태는 절제와 자기 수양을 통해 얻어진 덕목이 아니라 열정이 사라지면서 생긴 부산물일 뿐이었다. 은희경의 단편소설에도 불혹에 대한 같은 생각이 나와 있어서 나이 드는 것에 대해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나이 드는 것은 열정이 사라져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굳혀가고 있던 내개 여든 사살이 넘긴 헨델이 무대 위에서 보여준 폭발 같은 열정은 내 생각이 나이에 대한 편견이자 성급한 일반화였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첫 번째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열정이 사라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인생을 다 산 삶처럼 무기력하게 지내던 나는 이 90이 다 된 음악가의 연주회를 TV로 본 다음 날 아침 오랫동안 입지 않았던 젊은 시절의 가죽 재킷을 꺼내어 입어 봤다. 그러나 왠지 남들이 봐서 너무 튄다고 웃지나 않을까하고 걱정이 되어서 하루를 입고 벗어 버렸다. 

나이 들어도 열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게 결정적으로 각인 시켜준 것은 가브리엘 가르시아마르케스의 소설,<콜레라 시대의 사랑>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케이블 방송에서 <세랜디피티>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에서 여주인공사라는 조나단과의 첫 만남이 필연인지 알아보기 위해 노점에서 산 중고 책 첫 장에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은 후 그 책을 노점상에게 되 팔아버리면서 언젠가 그 책을 찾게 되면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조나단에게 말한다. 

조나단은 결혼식 며칠 전에 약혼녀로부터 결혼 선물을 받은 책에서 사라의 연락처를 보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사라와 다시 만나 사랑을 이루게 된다. 이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을 다시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된 책이 바로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었다. 콜레라 시대라는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약간은 으스스한 제목 때문에 읽어 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생기지 않은 터라 나는 제목만 겨우 희미하게 기억 할 뿐 누구의 작품인지도 모른 채 그 책을 조용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 데 어느 날, 오프라 윈프리 토크쇼가 주관하는 독서 클럽에서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이 달의 책으로 선정 된 것을 보게 되었고, 그제야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쓴 마르케스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의 책이 길래 영화에서 그렇게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했고, 왜 오프라 원프리 쇼에서 “이달의 책으로 선정되었을까” 궁금증이 발동하기 시작 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예열과정을 거쳐 드디어 읽게 된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후 가장 큰 감동을 내게 안겨 줬다. 어느 영화 제작자는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로미오와 즐리엣>이후 최고의 러브스토리라고 극찬했다. <로미오와 즐리엣>이 픗픗하면서도 불같이 타 올랐다가 스러지는 어린 10대들의 사랑을 보여주는 러브스토리라면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청년기에 시작된 사랑을 50년 이상 지속적으로 키워나가서 70대 이후에 결실을 맺는 어른들의 열정적인 노인들의 러브스토리였다. 그러나 이 소설은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네게 70대에 할 수 있는 일이 죽을 기다리는 것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사랑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죽을 때까지 사그라지지 않은 뜨거운 열정의 찬가였다

아름다운 소녀 페르미나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 가난한 청년 플로렌티노,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몇 년간 사랑을 나누지만 페르미나는 플로렌티노와 결별하고 부유한 의사와 결혼해 버린다. 플로렌티노는 페르미나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묻은 채, 언젠가 그녀 에 떳떳하게 나타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하고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수많은  여성들을 편력하면서, 그러나 오르지 페르미나만 사랑하면서 기녀를 기다린다. 

장장 51년 5개월 4일을, 페르미나의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플로펜티노는 달려가서 장례를 도와주고 장례식 날 저녁 페르미나에게 청혼을 한다. 자신을 마치 미친 사람 취급하는 페르미나에게 플로렌티오는 예전처럼 다시 편지를 보내기 시작하고 편지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플로텐니오가 부 회장으로 있는 선박회사의 중기 선을 타고 막달레나 강을 따라 여행을 떠난다.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 오랜 세월을 마음에 품고 기다리다. 노년에 이르러서야 결실을 맺게 된 플로렌티노의 파란만장한 사랑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꺼지지 않은 플로렌티노의 뜨거운 열정이었다. 

강 여행이 끝날 무렵 보수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사랑을 지켜내기 힘들 것이라고 예감한 플로렌티노는 배에서 내릴 필요 없도록 배안에 콜래라 환자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깃발을 달고 계속 배를 운행시키기로 결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배를 타고 강을 오르락내리락 할 것 같으냐는 선장의 질문에 플로렌티노는 53년 7개월 11일을 준비한 대답을 한다. “영원히”

날마다 하나씩 늘어가는 흰머리를 원숙함이 표시라며 두 손을 들어 기꺼이 환영 할 수 있을 만큼 나이 드는 것이 좋지도,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사람들의 빈말을 진심으로 착각하며 나이 들지 않으려 기를 쓸 만큼, 나이 드는 것이 실지도 않다.

나이 드는 것을 그저 사는 것의 한 단계로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드릴 분이다. 다만 불혹이 상태, 열정이 없는 상태로 나이 드는 것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과로 받아드리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젊은 스타일인 캐주얼 스타일로 어e에서라도 젊음을 노래하고 싶을 것이다. 헨델과 지금도 막달레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을 페르미나와 플로렌티노를 마음속에 떠 올리며 또 하나의 이다 헨델과 플로렌티노가 될 수 있기를 날마다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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