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우리가 마신 것
1.
마신 맥주
며칠 전 생맥주가 몹시 마시고 싶었다. 그것은 마치 좋아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루 종일 떠올리는 되는, 통제 불가능한 상태처럼 느껴졌다. 매몰차게 거절당하기 전까지는 포기할 수 없는 마음으로 나는 생맥주를 생각했다. 그런 날 캔맥주는 생맥주를 대신할 수 없다. 아무리 비싼 캔맥주라 하여도 말이다. 한 모금, 두 모금, 부드럽게 넘어가고 나서 내뱉는 감탄사까지 생맥주를 마시는 과정에 포함된다. 호프집에 흐르는 익숙한 노래와 모르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뒤죽박죽 엉켜 있는 세계, 그 안에서 느끼는 부드럽고 고소하고 쌉쌀한 맛의 유혹을 나는 붙잡고 싶었다. 잊고 있었던 그 세계가 몹시도 그리워졌다. 그립지만 당장 나갈 수 없는 처지라면 그 그리움은 더 고조된다. 고조된 감정은 결국 방법을 찾아내고야 만다.
나는 방법을 찾았고, 결국 내 앞에 생맥주가 놓였다. 첫 잔이니 마주 앉은 친구와 잔을 부딪힌다. 벌컥벌컥 마시고 싶지만 나에겐 불가능한 일으므로 홀짝홀짝 내 방식대로 생맥주를 삼킨다.
아! 이거지!
준비된 감탄사가 나온다. 내가 오늘 얼마나 생맥주를 마시고 싶었는지, 그것을 함께 할 수 있는지 물어볼 사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요즘 내 기분이 어떤지, 친구의 기분이 어떤지, 우리는 마주 앉아 그런 이야기들을 순서 없이 꺼냈다. 거리낌 없이 나오는 말들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 속에서 맥주잔은 텅 비어갔다. 한 잔 더 마실까? 우리는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짧게 느껴진 두 시간이었지만 집에 돌아가는 길 느꼈던 아쉬움마저도 낭만으로 기억될 밤공기를 우리는 멀어지면서도 나누어 마셨다.
2.
마시지 못한 맥주
2011년 3월 9일, 나는 오사카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난바역 근처와 교토, 오사카성을 둘러보는 정도의 평범한 일정이었다. 그렇다 해도 혼자 가는 해외여행은 처음이라 시간과 일정, 여행 관련 정보 등을 나름 꼼꼼하게 PPT로 만들었다. 일정에는 따로 적어두지 않았지만 혼자 술집에서 맥주를 꼭 마셔야지 생각했다. 여행 시작부터 마시면 다음 날 일정에 영향을 줄까 봐 마지막 날로 그 계획을 미뤄두었다. 호텔 근처를 둘러보며 어디에서 마실지 대충 생각은 해두었다.
그 계획은 예상할 수 없는 일로 무산되었다.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지역에 지진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오사카성 근처에 있었다. 지진 관련 경보음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다음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화와 문자가 와서 지진 발생 소식을 알게 되었다. 뒤숭숭한 기분으로 나는 낯선 거리를 걸었다. 남은 저녁 일정은 우메다 스카이빌딩에 있는 공중정원에 가는 것이었는데 나는 길을 잃었고,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차선책으로 적어두었던 브리제 타워에 갔다. 무료 전망대가 있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후쿠시마에는 난리가 났는데 오사카의 일상은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졌다. 전망대에서 본 것은 금방 잊혔는데 그때 일리 커피 직원이 내게 말을 건 것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내게 한국인이냐고 물으면서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 관심이 많은 사람 같았다. 대화라고 할 것도 없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잠시 안도했다. 낯선 곳에서 며칠 입을 닫고 있었기에 느낄 수 있었던 묘한 감정이었다.
호텔로 가는 길, 술집에는 직장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내일 별일 없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며 그곳을 지나쳤다. 호텔 로비에는 오늘 여행을 시작하는 것으로 보이는 한국인 투숙객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몹시 불안해 보였다. 나는 7층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최대한 얕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것은 하루 종일 창문을 열어놓아도 전혀 나아지지 않을, 몇 년 동안 겹겹이 쌓여 배인 냄새였다. 없앨 필요가 없는 냄새는 그렇게 세월을 머금고 그곳에 남았다. 그 세월을 몸안 깊숙이 밀어 넣으며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뉴스를 틀었다. 아나운서가 안전모를 쓰고 재난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바라보았다.
여행 마지막 날의 맥주는 그렇게 멀어져 갔다. 나는 그날 밤새 뒤척였다. 지진이 나면 호텔 7층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생각했다. 타국에서 생을 달리 하는 일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냥 맥주라도 한잔 마시고 자는 게 나았을까. 역시 아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나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때 마시지 못한 맥주를 가끔 아쉬워한다. 왜일까. 결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아쉬워하고 싶어서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때 그 거리에 서 있다. 초저녁, 노란 조명과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찬 술집의 열기와 불안했던 내 마음을 번갈아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