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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May 16. 2023

희미해진다 해도 영영 사라지지는 않는다.


일찍이 나는 내 인생의 많은 시간을 내가 소유했다. 엄마, 아빠는 늘 사느라 바빴다. 어린 시절부터 정해진 일정(학교, 교회, 친척 모임) 외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내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그건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남는 시간에 집에서 그냥 TV를 볼 수도 있었고, 근처에 있는 남의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 수도 있었고, 옥상에 올라가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아쉽게도 혼자 책 속에 푹 빠지거나 그런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어릴 때 책이 재미있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그저 텅 비어 있는 선물상자처럼 의미 없는 시간이 어린 시절 내게 아주 많이 주어졌다. 부모님이 모르는 나의 세계는 늘 거기에 있었다. 그런 한가롭고 여유롭고 따분한 시간에 놓여 있는 기분은 좀 묘했다. 정해진 세계에서 이탈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가끔은 이탈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내가 정한 나름의 규칙 속에서 나의 세계를 지켰다.


내가 아이의 시간을 너무 많이 소유하고 있는 건 아닐까. 소유해도 된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워져 있는 틈을 메꾸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아이의 시간을 내가 가지려 드는 건 아닐까. 갑작스레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음식 앞에서 좀처럼 식탐을 내려놓을 수 없는 사람처럼 아이의 시간을 우걱우걱 대신 먹어치우려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아이에게 지루하고 심심한 것도 알아야 한다고 자주 이야기 하면서 정작 내가 그런 시간을 주긴 했을까. 이제 나는 지루하고 심심한 시간까지 아이에게 가르쳐 주려 든다. 그런 건 시간을 스스로 소유한 자만이 알 수 있다. 그 따분하고 별 거 아닌 시간 속에 뭐가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가진 특별한 시선, 아이가 머문 나이의 공간에서만 체득이 허락된 세계. 그 세계의 문을 아이가 열 수 있도록 내가 자리를 비켜줘야 할 텐데, 그게 참 쉽지 않다.


나는 아이가 자신의 세계를 가지길 원하면서도 그 세계에 내가 들어가지 못할까 봐 두려워 그 세계의 밑그림 그리는 일을 이따금 방해한다. 마음껏 자유롭게 너의 세계를 그리라고 해놓고 일일이 참견한다. 아이가 감당해 내야 할 실패와 상처를 미리 처방한다. 다치기 전에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여 놓고자 한다. 넘어지지도 않은 아이를 붙잡아 놓고 실수로 넘어질 뻔한 일을 트집 잡느라 바쁘다. 아이가 그린 밑그림에서 결국 나는 희미해져야 한다. 지금의 내가 그런 삶을 살듯이 말이다. 희미해진 가족들은 여전히 각자의 세계에 산다. 나는 그 방식이 좋다. 하나의 세계로 똘똘 뭉쳐지지 않아도 가끔은 자신의 세계 문을 살짝 열어 주긴 하니까. 잠시 만나 이야기하고 다시 자신의 세계로 가면 되니까. 그 방식은 의외로 꽤 안전하다.


그 세계에 그린 그림은 희미해진다 해도 영영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딘가에 존재한다. 지루하고 심심한 어떤 날을 기억하고 있는 그때의 내가 늘 거기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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