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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re Oct 04. 2022

14. 1년 후에 죽지 뭐..

‘삶’에 대한 확고한 의지도 대단한 목적도 없었다. 그저 하루를 무사히 넘기고, 또 하루를 지나며 살아갈 뿐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죽어야만 하는 명확한 이유도 없었다.

죽고 싶었고 죽어야만 할 것 같던 마음은 어느새 희미해져 가고 있었고, 그저 눈앞에 있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하루만 더 살아보자’는 결심이 있었지만, 갑자기 삶에 대한 의지가 엄청 강해 지거나 대단한 목표의식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살고 있었다.

오히려 가끔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때로는 그 누구보다 잘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가진 지난날의 기억이나 상담 치료를 진행하는 것들 모두 주변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혹여나 내 모습을 들킬까 초조해하며 누구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 열심히 사는 사람인척 하며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다짐인지, 열심히 사는 척하겠다는 다짐인지 스스로도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살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삶에 대한 의지인지, 의지 인척 보이기 위함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지며 살다 보면 한 번씩 이유 없는 좌절감과 무기력함에 빠지기도 했다.

그럴 때는 나 자신을 끝이 안 보이는 동굴 속으로 한없이 밀어 넣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가끔은 그 동굴에 빠져 한동안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술이나 담배에 취미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 시기에 심각한 수준의 방탕한 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여러 번 생각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체질적으로 술과 담배 모두 몸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 즐기는 유흥 또한 흥미가 없는 성격이었다.

그런 내가 그렇게 한 번씩 밀려오는 우울감과 무기력함을 견뎌내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여행이었다.

처음 호주로 도망치듯 떠났을 때 잠시나마 내가 처한 현실을 잊을 수 있었던 기억 때문인지 자꾸만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 지금 내가 처한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도망을 치는 것인지 휴식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여행을 하기 시작했고, 주변에서는 그 용기가 부럽고 대단하다는 시선 뒤에 미래는 생각하지 않고 즐기기만 하는 한심한 사람처럼 보는 시선도 늘어나고 있었다.

나를 위함이라는 포장의 말로 듣는 비난과 충고의 말도 여러 번 있었고, 대놓고 정신 차리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럴 때면 늘 속으로 생각하는 말이 있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이러는 거야..’

누구보다 정신을 차리고 싶은 나였다. 누구보다 흔들리지 않고 싶은 나였다.

그런 내게 이제 나이를 생각해라, 정신 차려라 하는 말들은 그저 상처 하나가 더해지는 것 밖에는 안 되는 말들이었다. 걱정을 빙자한 타인의 충고는 내게 화살처럼 꽂혀 상처가 될 때가 많았고, 아주 가끔 진심 어린 걱정은 한 번씩 위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용기에 대한 부러움과 걱정으로 포장된 비난의 시선이 더 많았기에 그 누구에게도 내가 방황하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굳이 할 필요 없는 이야기 이기도 했지만,  가끔은 ‘그렇게 혼자 다니는 게 무섭지 않냐’, ‘대단하다, 근데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나중에 어떻게 할래’ 등등.. 의 말을 들을 때면 살기 위해 이러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해야 할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겪은 일들에 대해 타인이 어떤 시선으로 나를 봐줄지 알 수 없었기에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의 섣부른 위로도 상처가 될 것 같았고, 내 잘못이 아니라는 교과서적인 말도 의미가 없을 것 같았고, 안타까운 시선 혹은 비난 섞인 시선은 아주 큰 상처가 될 것만 같았다. 그 어떤 반응도 받아들일 용기도 자신도 없었다. 

특히 20대 후반에는 중학교 때부터 소위 베프라 자부하던 친구와 인연을 끊게 되면서 더더욱 그런 생각이 강해졌다.

모든 부분에 있어서 서로 비밀 없이 공유하고 이해해 주길 바라던 친구였지만, 정작 나의 아주 사소한 어려움은 이해해 주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미련 없이 13년의 인연을 정리했었다.

한때는 매일같이 우리는 베프라고 외치던 그 친구에게 처음으로 내가 가진 상처를 털어내고 위로를 받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지만, 그보다도 사소한 부분에서 이해와 배려 따위는 없는 그 친구를 보며 결과적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인연을 끊은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본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힘들고 어려운 일로 생각하며 위로를 바랐지만, 내가 가진 고민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치부하던 친구였기에 인연을 끊고도 한 번도 후회하는 마음 없이 관계를 정리할 수 있었다. 가족 이외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친구였기에 늘 서로 간에 더 크게 실망하고 더 크게 상처를 받기 일쑤였다.

친구라고 해서 나를 이해해 줘야 하는 게 당연한 것도 아니었고, 그래야만 하는 이유도 없었지만 늘 가장 친한 친구라 외치던 그 친구의 말을 너무 믿었던 탓인지 배신감 같은 감정이 들 때도 많았고 서운함도 더 컸었다.

이런 감정은 연애를 하면서도 느껴질 때가 많았다.

심리 상담을 하면서 알게 된 부분이었지만, 나와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자주 하는 실수 중에 하나라고 했다.

가족 혹은 가까운 지인이나 연인에게 본인이 가진 상처에 대해 털어놓는 순간, 본인은 굉장히 어렵고 힘든 이야기를 한 것이기에 그에 대해 상대방이 위로와 공감을 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대놓고 '나를 위로해줘!'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치부와 같은 일이라는 마음이 은연중에 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본인의 상처와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순간 '나를 좀 이해해 주지 않을까, 나를 좀 위로해 주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심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도 그랬었다.

엄마와 큰언니가 처음 내 상황을 알고 나서 세상이 무너질 듯한 큰 일인 것처럼 나를 돌보고 위로했었기에, 어쩌면 나도 모르게 그런 마음은 더 커졌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가족이었기에 가능했고, 부모이기에 느끼는 죄책감과 책임감이었던 것이었다.

내가 아닌, 내 가족이 아닌 타인이 당연하게 나를 위로하고 걱정해 줘야 하는 이유나 의무는 전혀 없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일수록 위로와 배려를 바라고 기대한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더 큰 상처를, 또 다른 상처를 받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래 왔었다. 

특히나 처음 정식으로 사귀었던 사람과의 잠자리에서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경험하고 나서는 이성과의 관계가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이 내가 겪은 일들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는 일들에 대해 미리 말을 했었다. 이성과의 만남과 관계에 있어서 나도 모르는 나의 새로운 모습이 언제 어떻게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기에 미리 양해를 구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위로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심리가 작용된 이유였다.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그럼 경험과 상처가 있는 여자는 부담스러워했고, 이해를 하는 척했지만 결국엔 이해하지도 제대로 위로하지도 못한 채 나는 나대로 상처만 받고 끝나 버렸다. 

그런 경험과 상처는 나를 또다시 끝도 없는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끝엔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또다시 습관처럼 올라오기도 했다.

힘듦과 상처를 받는 마음 끝에는 늘 삶을 포기하겠다는 생각이 따라왔다. 

그럴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상처와 슬픔에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 가지 다행스럽고 희망을 가져 볼만한 것은 그 슬픔과 상처에 빠져 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처의 우물 안에서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다가도 어느새 스스로 조금씩 정신을 차리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허우적거리는 나 자신을 물 밖으로 꺼내어 놓고 다시 한번 다짐하고 생각했다.


"한 달만 더 살아보자. 그렇게 죽고 싶으면 1년만 더 살아보자. 그리고 1년 후에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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