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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Jan 28. 2024

순천에야? 살판 나부렀네

한달살이에서 잠깐의 외도




어제 저는 순천에 왔답니다.

대학원 시절 소설 창작을 가르쳐 주신 교수님을 만나러요. 교수님은 고등학교 때 제가 소속된 문예부 지도교사였고, 현대문학 수업의 선생님이던 분이어서 저는 '선생님'이라 불러요.

함께 소설을 배웠던 친구 C가 전주를 출발해 순천으로 향하는 그 시간, 저는 무안에서 순천으로 달렸지요. 너무나 그리웠던 순천으로요.


https://brunch.co.kr/@changada/45



고모가 순천에 선생님 뵈러 간다니까

"살판 나부렀네."

라고 하셨는데 글은 안 쓰고 어딜 다니냐 그런 뜻으로 한 말씀인 건지, 재밌겠다는 뜻이었던 건지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찜찜한 일은 결국은 생기나 봐요.


영산강에 놓인 다리를 건너며 풍광이 너무 아름다웠지만 멈출 만한 데가 없더라고요. 쉼터를 세워달라고 민원을 넣어볼까 싶었어요. 다리 위를 운전하며 아름다운 강의 모습은 왜 눈으로만 힐끗하며 지나쳐야 하는 것이냐.


친한 동생의 고향인 영암을 지나며 동생과 엄니도 떠올렸어요. 엄니가 혼자 계신다 했는데 오늘은 무얼 하고 계실까 잠시 상상해보기도 했고요. 강진과 해남 표지판을 보며 농촌활동 가던 젊은 날을 추억했어요.  


장흥을 지나치며 이청준 작가의 생가를 갔던 날의 햇살이 눈에 선했지요. 소설을 함께 쓰던 글벗들과 떠난 문학 기행이었어요. 언젠가 장흥에 다시 가 보리라 추억의 날개가 촤르르 펼쳐지면서...


무안에서 순천까지 도대체 몇 고장을 지나쳤는지 모르겠어요. 지리에 취약한 사람이라, 중간에 졸음쉼터에서 내려 지도를 확인하다 보니 남도는 저와 인연이 참 많구나 새삼 깨달았어요.




선생님과 친구 C와 아랫장에서 만났어요. 아랫장은 순천의 대표적인 전통시장이에요. (아랫장은 선생님과 2018년 대학원 한 학기를 남겨둔 여름, 긴 이야기를 나누던 추억의 장소이기도 해요.) 우리는 점심 겸 저녁을 먹기로 했어요. 

선생님이 강력히 추천하신 전집으로 가서 녹두빈대떡을 시킨 뒤 나우누리라는 깨끗한 느낌의 막걸리로 6년 만의 해후를 축하했지요.


선생님의 강추 요리, 녹두빈대떡


C가 좋아한다는 깻잎전, 해물파전까지 참말로 맛있었어요. 녹두빈대떡의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식감이 좋아서 과식을 했던가 봐요.


지나온 근황 토크에 이어,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 노후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지는 동안 선생님이 얼마나 기분이 좋으신지 국밥 맛난 데로 가자, 하셔서 자리를 옮겼을 때부터 무언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걸 느꼈는데 모른 체했어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벌어지는 일>

전집에서 이미 배가 다 채워진 상태였어요. 그럴 때 무얼 더 먹으면 반드시 탈이 났던 과거의 경험이 있음에도 신나는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모둠순대가 들어있는 세트 메뉴를 주문에 동의하고 국밥도 시키고...


국밥을 한 숟가락 먹는 순간 '어, 힘들다'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근데 선생님의 밝은 얼굴을 보니 주체할 수 없는 본능으로 질주를 계속했지요. 

소주에 사이다를 넣어 하이볼을 흉내 낸 술을 몇 잔이나 마셔댔고요.


카페로 옮겨서 감기를 예방한다는 뱅쇼를 주문했어요. 맛도 좋은 그걸 세 모금 마신 순간, 바로 그 순간, 아 제대로 탈이 나겠구나, 싶더라고요.


카페 <브루웍스>
계피향 강하고 맛도 진한 뱅쇼
그 시절 정말로 사랑하던 동천


배가 6, 7개월 된 임신부처럼 부풀었고, 살살 아파져 오기 시작했어요. 선생님과 C에게 말하지 못한 채 견디다가 택시 타고 가시는 선생님을 배웅하고, 호텔로 들어와서 넉다운됐지요.


그때 약을 사 가지 않았을까요. 편의점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과식에 피로감 때문일 거야, 그러잠을 청하자 했던 것이 문제를 키웠지요.

"살판 나부렀네."

고모 말씀이 맴돌았어요. 고모의 말이 복선이 된 것 같았어요.


밤새 배를 움켜쥐고 뒹구느라 거의 잠을 자지 못했어요. 새벽 3시에는 카운터에 소화제라도 달라고 해야겠다 싶어 내려갔는데, 담당자가 보이지 않았어요. 

그제야 편의점 생각났어요. 아까 선생님 배웅하던 길에서 본 편의점!


카운터만 들를 생각에 반팔 티셔츠에 얇은 니트, 바지 차림으로 나온 저는 칼바람이 는 밤거리를 달렸어요.

얼마나 아팠으면 추위를 많이 타는 제가, 어둠을 몹시 무서워하는 제가 그런 과감한 달리기를 할 수 있었을까요.


아야만 하겠기에, 아픈 건 너무너무 싫어서, 추위 따위, 어둠 따위, 낯선 사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외치며 달려라 창창, 달려!


소화제와 진통제를 사 왔지만, 친구가 깨지 않게 하기 위해 물도 못 꺼내고 액체 소화제에 진통제를 삼키고 잠을 청했다는, 아주 미련하고 어리석은 창창의 '한밤중에 있었던 일'이랍니다.




친구는 전주로 돌아가고 저는 아직 순천에 있어요.

안산 올라가면 다시 내려오기 힘들 거라는 생각에 순천 그림책 도서관을 검색해 찾아왔거든요. 천으로 된 푹신한 의자에 앉아 그림책 보다가 한 시간도 넘게 잠이 들었네요.


방문객이 없는 시간대라 마음놓고 잠들었어요.


복통은 조금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아프네요. 밤새 잠을 자지 못해 머리도 멍하고, 계속 하품이 나는 졸린 상태이고요.

그래서 오늘 글을 휴재해야 하나, 순천 사진으로 도배된 글로 대신해야 하나, 오래 망설였어요.


그림책 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연재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도서관에서 몇 시간째 머무른 것이니, 할 일을 하고 가자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어요.

이렇게 변명 같은 글, 결국은 긴 글이 되어 버린 연재, 죄송해요. 꾸벅.


오늘의 교훈

분위기에 휩쓸려 나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을 함부로 하지 말자.   




순천 그림책 도서관 정말 좋네요.

여유롭고 부드러운 공간, 아이 중심의 동선, 쉴 공간이 많은 것, 그림책극장과 도슨트의 설명까지 알차네요.

순천 여행하시면 들러보시기 추천합니다.

그야말로 발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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