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 못하지만 본다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문학동네, 2007.

by 창창한 날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두 연인이 처음 만난 장소는 맹인들이 안내하는 식당이었다. 두 남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서로를 강하게 느낀다. 그 설정이 몹시 인상적이어서 오랫동안 이 영화가 기억에 남았다. 두 사람은 시각에 판단력을 빼앗기지 않아서 상대에게 끌리는 자신의 마음과 상대를 더 신뢰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단편 <대성당>은 시각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편견을 상식인 줄 아는 남편의 시선으로 서술된다.

아내의 오랜 친구인 맹인 남자가 방문하는 게 영 마뜩잖아서 공연히 트집 잡는 속 좁은 남편 말이다.


그 여자가 살았을 삶의 행로가 얼마나 가엾은 것인가를 생각하게 됐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 속에 비친 자신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여인을 상상해 보라. 사랑하는 남자에게 지나가는 말이라도 예쁘다는 칭찬을 듣지 못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야만 하는 여자. 292~230쪽


남편이 맹인을 편견으로 대하는 자세가 작품의 도처에 깔려 있다. 뭘 이 정도까지 꼬였어, 이 남자는, 하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오게 하는데, 끝에 가서는 그 시선을 가진 이가 다름 아닌 나였다는 걸 깨닫는다.


맹인을 가엽게 여겼던 서술자야말로 볼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는 심지어 귀를 가지고 있음에도 아내로부터 들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무심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온전하게 가진 감각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서술자와 나 같은 사람은 눈을 맹신하기 때문에 사물의 진실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내 눈으로 확인했으므로 다 안다고 착각하기 쉬우니까.


하지만 맹인은 시각을 잃은 대신 다른 감각을 동원해 더 많은 걸 볼 줄 알았다. 어쩌면 당연하게 믿었던 현상 너머에 있는 진실을.

게다가 모든 걸 기꺼이 배우겠다는 태도를 지녔다.


"이 사람아 다 괜찮네." 그 맹인이 말했다. "난 좋아. 자네가 뭘 보든지 상관없어. 나는 항상 뭔가를 배우니까.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니까. 오늘밤에도 내가 뭘 좀 배운다고 해서 나쁠 건 없겠지. 내겐 귀가 있으니까." 그가 말했다. 303~304쪽


자신을 하찮고 기대할 것 없는 사람으로 넘겨짚고 대하는 서술자 앞에서 시종일관 여유가 넘치는 맹인은 보지 않고도 보는 법을 가르쳐준다.

이를테면 TV 다큐멘터리에서 중세의 대성당을 보고 큰 종이에 함께 그리는 과정에서 서술자를 대성당에 가 있게 안내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

20세기 후반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 1980년대에 미국 단편소설 르네상스를 주도했으며, ‘헤밍웨이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가’ ‘리얼리즘과 미니멀리즘의 대가’ ‘체호프 정신을 계승한 작가’로 불린다.

1938년 5월 25일 오리건 주 클래츠케이니에서 태어나 1988년 8월 2일 워싱턴 주 포트 앤젤레스에서 폐암으로 사망했으며, 소설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대성당>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에세이ㆍ단편ㆍ시를 모은 작품집 <불, 시집 <물이 다른 물과 합쳐지는 곳> <밤에 연어가 움직인다> <울트라마린> <폭포로 가는 새 길> 등을 펴냈다. - 출처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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