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죄송한데 차를 좀 빼 주실 수 있을까요? 제 차가 선생님 차 안쪽에 있어요. 렌터카라서 반납해야 하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요."
30분 전 주차를 하고 식당에 왔을 때 '파랑'의 전화를 받았다. 앳된 느낌의 예의 바른 목소리가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선연하다.
게스트하우스 앞 공터에 주차할 때 고민을 하긴 했다. 안쪽에 주차된 차가 있어서 혹시 그 차가 나가려 하면 난감할 듯했다. 차주에게 연락해 보려다 숙소의 불은 켜졌고, 더 이상의 외출은 하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하여 가까운 식당으로 향했다. 만약 차를 빼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전화기의 벨소리를 켜두었다.
콩나물국밥 몇 숟갈을 남겨놓았을 때 전화가 왔다. 얼마나 깍듯한지 상대를 저절로 순해지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고개 숙여 인사하는 파랑이 보였다. 고등학생인지 대학생인지도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어려 보였다. 머리를 하나로 묶은 자그마한 체구의 파랑은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인사한 뒤 차 안으로 들어갔다.
숙소로 들어갔을 때가 저녁 8시, 침대에 느긋하게 누워 여독을 풀며 그곳 게하의 필수 프로그램인 '회고'(밤에 15분 동안 하루의 여정을 나누는 시간) 시간을 기다렸다. 낯선 사람들과 라운지에서 얼굴 보며 무슨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일까?
게스트하우스(게하)의 1층은 라운지, 2층과 3층은 숙소였고, 나와 친구는 3층(6인실)에 묵었다. 같은 방에 지난 연재에 등장한 옐로와 핑크가 묵었다.
드디어 회고 시간이 되었다. 나를 제외하고(친구는 피곤하다고 숙소에 남았다) 십여 명이 이, 삼십 대였다. 나 혼자만 중년이어서 위축되었는데, 우리 방의 '옐로'(브런치북-지금이 젤로 젊다 GOGO-02화 MZ 씨, 우리 얘기할까요? (brunch.co.kr))와 자동차 빼는 일로 일면식을 한 파랑이 알은척을 해 주어서 어색함을 모면하였다.
자기 차례가 되자 파랑이 야무진 음성으로 또박또박 회고하였다.
"제가 오늘 다녀온 곳은 연미정과 평화전망대였습니다. 저는 대학 때부터 같은 과 친구와 우리나라의 국경선을 탐방하는 일을 해 오고 있습니다. 평화전망대도 그래서 갔던 것이고요. 강화는 국경선을 보기에 굉장한 요충지입니다."
나중에 파랑이 탐방했던 국경선들을 즐겨찾기로 찍어 놓은 휴대폰도 보여주었다. 어쩜 이런 공부를 이어올 수 있었을까.
이십대로보이는 파랑이 평화전망대를 다녀왔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대학 때부터 국경선 탐방을 해 왔다니, 사회학도인가 보다 추측했고, 퍽 인상 깊었다. 같은 과 친구라 함은 파랑보다 하루 늦게 등장한 블랙을 말하는 거였다.
친한 친구와 여행하는 것도 좋으나 혼자 여행 가면 낯선 사람과 대화하기가 쉬워서 좋은 측면이 있다.
내 친구가 하룻밤 자고 먼저 돌아간 뒤에 나는 좀 더 능동적으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나의 여행지는 회고 시간이나 거실에서 오고 간 대화에서 힌트를 얻어 유동적으로 바뀌었다.(적잖이 팔랑귀라서)
2층과 3층의 여행자 십여 명은 회고가 끝난 10시 즈음부터 2층 거실에 모여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행지와 식당, 카페, 굿즈샵에 관한 정보를 교환했다.
마지막 날에는 내밀한 이야기들이 수순처럼 나왔다.
파랑의 대학 친구 '블랙'이 다음 날 제주에서 올라왔다. 제주에서 강화를 보겠다고 올라오다니,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블랙은 파랑 못지않게 야무지고 단아한 인상에 무척 조리 있게 말하는 분이었다.
두 친구는 서울에서 사범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해 각자의 고향으로 내려가 중학생을 가르친 지 3년 차였다. 방학 때마다 국경선을 탐방한다는 두 분. 군산과 제주의 사회 선생님들이었다.
파랑은 군산에서 근무하는데 학교를 언급하는 태도마저 놀라웠다.
"저희 학교 선생님들은 신입 교사를 돕기 위해 모두가 애를 써 주세요. 어떤 일이 힘들다고 입 밖으로 말하는 순간 이미 일이 반은 해결되어 있는 거예요. 정말 존경스러운 분들이세요. 이런 곳에서 일하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이 말은 여러 번의 대화가 오고 간 과정을 집약적으로 써 놓은 것이다.)
다음 날 등장한 블랙도 비슷한 말을 해서 나를 포함한 다른 여행자들이 입을 모아 "와, 그런 샘들이 많이 계셔서 다행이네요. 우리나라 교육계 정말 멋져요." 하고 감탄했다.
"저희 학교 앞이 바다예요. 수업하는 중에 돌고래도 곧잘 볼 수 있어요.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는데 말릴 수가 없어요. 여름엔 바다에 뛰어들기도 하죠."
아, 낭만적인 수업 어쩔 거야.
"저 얼마 뒤에 제주로 여행 갈 건데 혹시 그 학교 앞에서 선생님 성함 불러도 돼요?'
내가 우스개를 했더니 파랑과 블랙 둘 다 입모아 "네, 오세요." 하고 대답해서 기분 좋았다.
학교와 학생들을 애정 어리게 말하는 파랑과 블랙의 모습을 보며 그들이 자랑하지 않아도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쌤들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나흘 째 밤, 파랑과 블랙은 강화 장터에서 순살닭강정을 사다 다른 여행자들에게 함께 먹자고 내놓았다. 똑똑한 데다, 예쁜 데다, 상냥한 데다, 인심까지 후하니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두 분이었다.
자정이 넘어서까지 공교육에 관한 쌤들의 경험담과 문제의식, 다른 여행자들의 의문들까지 할 얘기들이 끊기지 않았다.
파랑이 회고 시간에 준 정보 덕에 평화전망대를 들렀다.(실은 계획에 없었으나 팔랑귀답게 냉큼 GOGO)
전망대까지 들어가려면 신분증도 제시해야 하고 보초 선 군인들을 두 겹을 통과해야 한다.
평화전망대 3층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을 때는 폐장 시간이 단 20분밖에 남아 있지 않아 저급했다. 파랑의 강추가 아니었다면 아예 들어가지 않았을 거다.
탁 트인 통유리 앞에 섰다. 강 건너편 땅이 북한이라 쓰여 있었다. 그 땅과 나 사이에 한강이 흐르고 있으니 강남에서 강북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북한! 정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북한이 있고 북한 주민이 있다니. 너무 가까워서 비현실적이었다.
500원짜리 동전이 없어서 망원경으로 북한 주민의 생활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아쉬운 대로 실시간 북한 영상을 보았다. 다양한 옷차림의 주민들이 차로 10분이면 닿을 거리에서 움직이고 있다. 한강 대교 건너듯 건너면 닿을 자리에서.
전망대에서 나오면 '철산리'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어귀에 차를 세우고 골목을 걸었다. 여느 시골 마을과 다르지 않았다. 무안만큼이나 폐가도 꽤 있었다.
이 마을에서도 강 건너 이북이 보였다. 이 마을에 사는 분들은 매일매일 이북땅을 코앞에 두고 간담이 서늘한 밤을 보낼까. 기찻길 옆에서 나중에는 기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하듯 임의롭게 생활할까.
며칠 더 여행하는 동안에도 평화전망대와 철산리에서 받은 인상이 지워지지 않았다.
파랑과 블랙 덕분에 관심 밖이던 평화전망대를 가 본 것은 예상치 못한 자극이 되었다. 젊은이들도 관심 갖는 통일 문제를 너무 등한시해 온 내가 부끄러웠다. 이제 나의 뇌 지도에 통일이라는 영역이 자리잡힐 터이다.
낯선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과정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곳을 보게 만들어 주는 일이다. 익숙한 것만 바라보려 하는 굳은 뇌에 신선한 물을 뿌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