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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Mar 13. 2024

MZ 씨, 우리 얘기할까요?

사랑스러운, 대구의 핑크와 옐로


아이들이 좋다.

그들이 나를 좋아해 줄지는 의문이지만.

아이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에 물들고 싶다.

아이들뿐 아니라 젊은이들도 좋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젊은이들을 만나면 그들의 푸르름이 내게도 전해져 오는 것 같아 경쾌해진다.


꼰대, 라떼 따위로 취급되기 두려워 조심스럽지만, 내 마음은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순간 이동하듯 달려간다. 그들이 나를 좋아해 줄지는 의문이지만.

가끔 내게 매우 호의적인 젊음들도 있으니, 눈치껏 다가다. 첫 대면부터 쉬운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면서.




핑크와 옐로는 대구에서 온 스물두 살 찐친들이다. 중학교 동창으로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둘 다 휴학한 상태라 했다.

기념이 될 만한 둘만의 여행을 온 날, 게스트하우스 6인실에서 우린 만났다.

강화읍에 있는 <아삭아삭순무> 게스트하우스(혹은 민박)라는 곳이었다.


아삭아삭은 반드시 2박에서 5박까지 묵도록 되어 있다. 밤 9시 반이면 '회고'라는 시간에 참여해야 한다. 게스트하우스 라운지에 모여 각자 그날의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나 음식을 소개다.

(나를 제외하고 열 명 남짓 여행자들이 이삼십 대여서 처음엔 미안하기까지 했으나, 회고 시간 덕분에 이튿날부터는 '아는 사람'이 되었다.)


개인별 1분 정도씩 나누는 15분 남짓의 효과는 놀랍다. 여행객들의 서먹서먹함이 깨지기 때문이다.

다른 여행객의 여행 정보 덕분에 다음 날 여행은 '그곳으로 가서 그것을 먹는다'. 극내향형이라 밝힌 이들도 회고 시간만큼은 소중한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 같다. 빠지면 후회니까!


이미 마음의 벽이 허물어진 여행객들은 회고가 끝난 뒤 방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거실에 모여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이튿날 밤부터는 맛집에서 사 왔다며 빵, 치킨 등을 풀어놓는다. 얻어먹었으니 다음 날은 자연스레 내가 야식을 사다 놓는다. 그리고 수다수다, 파튀파튀~ 강화의 구석구석을, MZ의 시선으로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핑크는 예의 바르고 잘 웃었다. 친구 옐로는 다른 지역에서 오느라 하루 늦게 합류해서 방에는 그녀와 나, 나와 동행했다 1박만 하고 돌아간 내 친구가 있었다.


첫날 회고가 끝난 뒤 젊은이들의 수다에 끼는 게 눈치 없나 싶기도 하고 내향형 내 친구가 그냥 쉬겠다고 하여 나는 먼저 방에 들어왔다.

자정 즈음에 핑크가 수건으로 머리를 싸고 들어오더니 주저하며 물었다.

"방에서 드라이어를 써도 될까요? 거실에서 사용하면 건넌방 분들께 죄송해서요."

방에선 드라이 사용이 제한돼 있 묻는 거였다. 핑크는 상대에게 의향을 묻는 식으로 타인을 배려했고, 그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나와 친구는 누운 채 잠이 오지 않았으므로 기꺼이 그러라고 했다. 
드라이질을 끝낸 핑크에게 다음 날 여행지를 물었다. (친구와 나는 아무 계획이 없었고, 늦게 일어나 읍성이나 걷자고 하였다.)

핑크는 새벽 6시 반에 '국화저수지'까지 걸어가서 일출을 볼 거라 했다.

"3킬로미터 정도 되더라고요. 새벽 공기 맡으며 가 보려고요."


첫 여행 날 종일 걸었다는 그녀가 새벽에 일어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서 넌지시 말했다.

"핑크 씨, 혹시 준비가 늦어지면 제가 차로 태워다 드릴 수 있는데..."

"아니에요. 아침에 푹 주무셔야지요. 신세 질 순 없어요."

핑크는 정중히 사양했다.

'그래, 아줌마 차를 왜 타겠냐. 불편할 테지.'


이튿날 새벽 여섯 시에 눈이 떠졌다.

핑크는 머리를 감고 말리고 옷을 입느라 분주하면서도 나와 친구의 잠을 깨울까 봐 무척 조심스레 행동했다. 저러다간 일출을 보겠나, 내가 다 걱정이 되었다.

"핑크 씨, 저랑 친구도 일어났는데 함께 가도 될까요?"

"어머나, 그럼 감사하지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기온도 아주 낮던데요."

"일출, 저녁놀 엄청 좋아해요. 같이 가요."

와 친구는 양치만 한 뒤 핑크와 국화 저수지를 향해 달렸다. 


먼 산에 가려져 일출시각보다 20분 늦게 떠오른 해 덕분에, 핑크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 수 있었다.

핑크는 내년에 유럽의 교환학생으로 가려고 올 일 년 동안 영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한다고 했다. 패기가 넘치는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외알못(외국어 알지 못함)인 내게는 넘사벽인 MZ였다.


핑크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구입했다는 수동카메라로 일출 사진을 찍었다. 멋있었다.

필름이 비싸서 아주 아주 귀하게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신중하게 순간을 기다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늘 위로 툭 올라온 해를 보고 나서 나와 친구는 콩나물국밥을 먹으러 갔고, 전기자전거를 타고 광성보 갈 거라 했다.



국화저수지. 일출.


하루 늦게 도착한 옐로는 핑크보다 더 스스럼없는 성격이었다. 핑크처럼 잘 웃었고 핑크보다 낙천적인 듯했다. 옐로와 나는 탐색 시간 없이 친해졌다.

 친구는 1박만 한 뒤 안산으로 돌아갔다. 우린 원래 2주 동안 제주를 갈까 했다가 친구에게 사정이 생겨서 짧은 여행을 하기로 했으므로, 나 혼자 강화에 남아 네 밤을 더 잤다.




마지막 여행을 하루 앞둔 날 밤, 핑크가 트럼프를 구입했다며 함께 놀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보드게임이나 트럼프, 화투 놀이를 좋아하는 나는 "무조건 오케이죠" 하며 반겼다.

"그런데 뭘 하고 놀지요?"

"핑크 씨, 옐로 씨, 도둑 잡기 아세요?"

옐로는 해 봤지만 기억이 안 난다고 했고, 핑크는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싸. 내가 역할을 할 순간이군.'


그 밤, 우리는 도둑잡기에 이어서 원카드와 훌라까지 즐겼다. (훌라는 신혼 초에 남편에게서 배웠는데 학원생들에게 잘 써먹었고, 이번에도 그녀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어서 요긴했다.)

둘 다 명석해서 규칙을 잘 이해하였다. 트럼프를 끝낸 뒤에 핑크가 게스트하우스에 기증하고 간다고 하여 그녀가 더 예뻐 보였다.

카드놀이를 마친 뒤 우리 셋은 자정이 넘어서까지 사적인 이야기 나누다.

두 사람이 친하게 된 사연, 중학교 때 옐로가 이천으로 전학을 갔는데도 지금까지 만나게 된 이야기, 부모님 얘기, 대학 생활 이야기까지.

물론 나의 스토리도. 둘 다 브런치 구독까지 해 주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 핑크가 먼저 대구 집으로 출발해서 옐로 혼자 남았다.

"석모도 '보문사'를 꼭 가고 싶은데 이번엔 못 가겠네요."

강화읍에서 버스로 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종일 비가 온다고 해서 그렇게 결정한 듯했다.

"옐로 씨, 제가 동행해도 될까요?"

"그럼 저는 좋지만, 창창 님 집에 가셔야 하잖아요?"

옐로는 내가 보문사여러 번 다녀온 데다 그날 오후에 안산으로 갈 거라 한 말을 들었던 터라, 내 신세를 지지 않겠다 했다.


"저는 몇 번이고 가고 싶은 곳이에요."

진심이기도 했고, 옐로가 맘에 들어서 동행하면 즐거울 터였다.

40분이나 걸리는 차 안에서의 대화즐거웠다.


옐로는 내 친구가 구워준 CD를 부럽다며 사진을 찍었다. 

"CD를 굽는다는 말은 처음 들어요. 저도 그런 친구 있으면 좋겠네요."

나는 그 순간 내가 구워줄게요, 하고 싶을 정도였다. 옐로는 토이, 이문세, 김종서, 공일오비, 오장박 등 꽤 많은 가수와 노래를 알고 있었다.

MZ 세대가 우리 세대의 것들을 좋아해 주면서도, 그들 방식으로 새롭게 이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둘 다 싱어게인을 즐겨 시청했던 동지로서 노래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가 그녀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소설도 쓰고 싶다고 했고, 내 소설도 읽고 싶다고 했다.

"아, 우리 잘 통하네요."

옐로 신기하다며 연신 웃었다.


석모도로 들어갈 때 안개가 앞을 가리는 순간에도 우린 얘기 나누느라 무서워 할 겨를이 없었다.

석모대교를 건넌 뒤에야 내가 말했다.

"아까 안개 때문에 한 치도 안 보였는데 그걸 이제 깨달았어요."

"창창 님도요? 저도 그랬어요."

우리는 함께 깔깔거렸다.


비 내리는 고즈넉한 산사에서 옐로와 보낸 시간은 당분간 잊지 못할 것 같다. 옐로는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대화하는 사람이었다. 절 하는 법이나 대웅전에 들어가는 예절을 내게 조용히 묻는 자세에서 그녀가 누구를 대하든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게 전해졌다.

 

헤어지기 전 차를 마시며 옐로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비 오는 2월의 보문사는 처음이었고, 옐로빛 젊음과 함께 또 언제 오겠나 싶었다.

옐로는 도리어 내게 공을 돌렸다.

"창창 님이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고 질문도 진심으로 해 주셔서 신기하다 했거든요. 랫동안 학생들과 논술과 글쓰기를 하시며 대화를 많이 나눠 보셔서 그런 것 같아요. 게다가 솔직하시니까 저도 별 얘기 다 하게 되는 거 있죠."


옐로는 몇 달 뒤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날 거라고 했다. 수능 끝나자마자 별별 알바를 다했다는 그녀의 이야길 들으며 적잖이 놀랐다.

온갖 경험을 할 거라고 큰소리치고서, 덜 춥고, 덜 지저분하고, 덜 고된 일거리를 찾고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옐로는 내가 그렇다고 말하니 나를 위로했다.

"처음이라 그렇지,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두 친구에게서 꿈을 찾아 달리는 삶, 성실한 삶, 열정과 의지를 불태우는 삶에 대한 에너지를 받았다.

"대구에 '뭉터기' 드시러 오세요."

맛집을 좋아하는 핑크는 내게 대구로 놀러오라고 마지막 인사를 하였고, 우리는 포옹하고 헤어졌다.


옐로와는 아삭아삭순무에서 크루(보조 스텝)로 일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저 제주도 여행 갈 때 연락드릴게요. 꼭 만나요."


옐로는 그저께 제주도에 있다는 내용의 카톡을 보내왔다. 5월까지 게스트하우스 스텝으로 일할 거라며 그 전에 나더러 다녀가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무조건 오케이죠!" 하고 기분 좋게 이모티콘을 날렸다.



MZ 식으로 사진 찍기. 카페 조양방직에서. 우리 셋은 구경만 하고 나오는 것으로 마음이 통했다.



갑작스레 달려간 석모도 보문사. 비가 오는 보문사는 고즈넉하고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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