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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준쌤 Jan 28. 2024

번아웃 코치가 번아웃 증상에 걸리다

  재작년 여름, 나는 서울시민대학에서 번아웃 탈출 워크숍을 진행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비밀이 있다(사실 참여자들에게도 고백했으니 더 이상 비밀은 아님). 코치인 나도 번아웃과 유사한 증상을 한두 달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번아웃 탈출 워크숍을 진행하는 코치가 번아웃에 빠진 아이러니, 웃기지 않은가.


  번아웃은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을 크게 느끼고 무기력해지는 현상'이다. 강의로 전국 팔도를 유랑하던 청소년 진로교육 강사이자, 청년들과 함께 진로를 고민하는 진로 코치이기도 한 내가 번아웃 경고 증상이 있을 줄은 몰랐다.


  번아웃 경고 증상으로,

 1) 기력이 없고 쇠약해진 느낌이 든다.

 2) 쉽게 짜증이 나고 노여움이 솟는다.

 3) 하는 일이 부질없어 보이다가도 오히려 열성적으로 업무에 충실한 모순적인 상태가 

   지속되다가 갑자기 모든 것이 급속도로 무너져 내린다.

 4) 만성적으로 감기, 요통, 두통과 같은 질환에 시달린다.

 5) 감정의 소진이 심해 '우울하다'라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에너지 고갈 상태를 보인다.

 이 다섯 가지인데, 1번과 2번, 3번이 내게 해당된다.


  7월부터 일을 할 때나 사람을 만날 때나 쉽게 지치고, 기력이 없었다. 코로나 후유증인지, 날이 더워서인지, 일정이 많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너지가 많이 떨어졌었다. 마음의 여유나 숨 쉴 틈이 없어진 느낌도 들었다. 스스로에 대한 짜증도 늘었다. 그 짜증은 번아웃 경고 증상 3번으로 연결이 되었는데, 특히나 청소년 진로교육 강의가 잘 되지 않는 날에는 하는 일이 부질없어 보였고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나 싶었다.


  그렇다. 나는 청소년 진로교육에 대한 재미와 의미가 떨어진 상태였다. 간혹 예의 없이 행동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아무리 노력해도 듣지 않는 학생들을 볼 때면(물론 소수였다) 너그럽게 수용하는 척했지만 속으로 빡쳤다. 나한테도 화가 났다. 이때까지 갈고닦은 강의력이 겨우 그 정도냐고 되물었다. 억지로 만든 텐션을 내서 수업을 마무리하면 바로 집으로 가 침대에 드러눕고 싶었다. 에너지도 소진되고 감정도 소진되어 우울감이 들기도 했다.


“즉, 일과 삶에 보람을 느끼고 충실감에 넘쳐 신나게 일하던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건 그 보람을 잃고 돌연히 슬럼프에 빠지게 되는 현상이다.”

- 시사상식사전, <번아웃 증후군>


  그 현상이 내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신나지 않았고, 충실감은 옅어졌으며 일과 삶에 보람을 덜 느끼고 있었다. 휴식과 충전이 필요한 때였다. 하지만 일이 없을 때 누워서 웹툰을 아무리 많이 보고, 유튜브를 몇 시간을 봐도 기운이 나지 않았다. 나는 번아웃을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번아웃 탈출 워크숍 참가자라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과연 내가 참가자라면 그에게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이며, 무슨 말을 해줄 것인가. 그리고 함께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내 삶에서 어떤 것을 바꾸어볼 것인가 질문해 보기로 했다.


  우선, 그동안 애써왔던 자신에 대해서 아낌없이 ‘수고했다’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였다. 번아웃 탈출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는 코치이지만 번아웃에 걸린 나를 인정했다. 그리고 이를 고백했다. 나 자신과 타인의 이상에 부합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순간에도 내가 내 편을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칭찬일기, 감사일기 등 여러 툴을 통해서 최대한 나를 껴안아 줬다.


  이렇게 하니 마치 배터리가 0%로 되어가던 스마트폰에서 15%로 조금은 충전된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를 좀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에너지가 생겼다. 그래서 집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는 루틴을 만들었다. 때로는 따릉이를 타고 가고, 어떨 때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걸었다. 그리고 그 공원에서 가볍게 뛰었다. 몸의 감각을 느끼니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 같았다. 몸은 쉬지 않지만 뇌는 쉬는 기분이랄까. 습관적으로 누워서 웹툰을 보고, 유튜브를 보는 건 끊임없이 어떤 자극을 뇌가 받으니 휴식다운 휴식이 아니었다. 내게 맞는 휴식다운 휴식을 하는 게 두 번째였다.


  나를 위한 활동을 꾸준히 하다 보니 50%로 충전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제 일의 영역을 생각했다. 다른 일을 하고 싶은가? 아니었다. 나는 내 일을 여전히 좋아했다. 나의 변화와 성장을 통해서, 사람들의 변화와 성장을 돕는 일을 계속해서 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지금 하는 일을 조금 더 들여다봤다. 그리고 내 역량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과 일의 영역에서 조금은 다른 시도를 해보는 것은 약간의 활기와 에너지를 가져다줬다.  


  업무에서 완벽해지고, 완전해지려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그 과정을 즐길 수 있는 요소를 넣기 시작했다. 청소년 진로교육을 할 때 수업에 전혀 관심이 없이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친구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을 건넸다. 수업과 관련이 없는 질문일지라도 그냥 말을 걸었다. 대답을 해주더라. 대화를 나눴다. 물론 그 친구가 태도를 바꿔서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극적인 변화는 없었지만 그 태도에 속으로 화나기보다 존중해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맨날 하던 농담과 드립, 사례를 조금은 다르게 전달해보기도 했다. 익숙함이 아니라 낯선 곳으로 나를 밀어 넣으니 예측할 수 없는 신선한 흐름이 만들어졌다. 똑같은 시도를 하는 게 아니라 360도 중 1도라도 다르게 시도하는 것이 내게 에너지를 줬다.


  내 역량의 한계를 인정하되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 그리고 1도라도 다르게 시도해 보는 것이 번아웃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올 수 있게 해 줬다. 이로서 80%로 충전된 것 같다.     


  아마도 사람마다 겪는 번아웃 증후군의 증상은 조금씩 다를 것이다. 그러니 벗어나는 방법도 각자의 해답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번아웃에 있어 1시간 만에 100% 완충되는 급속 충전은 없다. 번아웃을 얼른 벗어나가기 위해서 조급한 마음에 무리하다 보면 오히려 더 기운이 없어질 수 있다. 지금의 나를 대면하고, 받아들이되 뇌를 쉬어주며 몸의 감각을 느낄 수 있는 휴식을 취하는 게 내가 터득한 방법이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챙겼을 때 비로소 일에서의 변화가 가능하다. 


  누구에게나 번아웃은 찾아온다. 지금은 조금 괜찮아졌지만, 내게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다. 그럴 땐 내가 썼던 저 3단계를 다시 일상에서 쓰리라. 무엇보다 번아웃 상태인 나 스스로를 받아들이리라. 날 자책하지 않을 것이다. 자책하는 나를 탓하지 않겠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첫 번째 행동이다. 비가 우중충하게 쏟아지는 날, 감기 걸릴 정도로 비를 맞지 않게 해주는 우산을 쓰는 것처럼. 우산을 쓰고 길을 걷다 보면 다시 햇살이 비추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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