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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의 용기

살람바 시르사 아사나

by 창민
살람바 시르사 아사나 1단계(무릎을 복부 쪽으로 굽힌)와 2단계(무릎을 등 쪽으로 굽힌) 그림

스트레스가 켜켜이 쌓여 역류했다. 셰이크 텀블러를 흔들 듯 심장은 상체를 흔들고 식은땀이 흘렀다. 탁탁거리며 이 부딪히는 소리에 입술을 잠갔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 힘을 주느라 들고 있던 수첩이 구겨지고 잉크는 땀에 번져 적어둔 메모글이 나의 의식과 함께 흐려졌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일상이던 10여 년 전 일이다. 모여있는 사람 수가 적으면 발표하고 평가를 받는 자리, 수가 많으면 의견 정보 업무 등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순간들이었다.

나의 천성은 숨어들기와 혼자를 좋아했다. 초등 때는 주차된 자동차와 건물 사이 틈으로 다니며 등교했고, 중고등 때는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인적이 드문 산을 모험하듯 했다. 20년 넘게 ‘혼자’를 선호한 나는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람들 앞에 서야만 했다. 하수구를 막고 악취를 내뿜는 누런 지방덩어리처럼 스트레스는 켜켜이 쌓여 결국 역류해 넘쳐버렸다. 그 살 떨리는 일을 그만두고도 계속 ‘혼자’를 고집했다면 치료의 필요성을 못 느꼈겠지만 여러 경험을 하면서 나는 사실 사람들과의 어울림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창시절에도 나는 꾸준히 외로워했었다는 사실도 ‘내면아이 상담’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요가 선생님 덕분에 알게 된 산속 찻집. 나무향 가득한 2층 창문 밖으로 벚꽃 꽃망울들이 재잘거렸다. 꽃망울들은 가지 끝에 옹기종기 모여 고개만 내민 채 볼이 터질 듯 웃음을 참고 있었다. 홍조 가득한 얼굴로 까르르, 장난기 많은 애기 도깨비들 같았다. 웃음을 못 참고 터져버리면 찬 겨울 동안 웅크린 사람들의 얼굴도 덩달아 웃게 만드는 신묘한 도깨비들이다. 신묘한 기운을 양볼 가득 담은 연홍색 벚꽃 꽃망울 아래에는 사람을 홀리는 기묘한 존재들이 있다. 모두가 하나같이 노란 치즈냥이들. 10마리가 넘는 이 아이들은 새침데기 같은 심보로 1미터 앞에서 요염하게 울렁거리다가 내가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사뿐한 걸음으로 거리를 벌려 애간장을 태운다. 그런 내 맘 아는지 모르는지, 산능선 같이 수려한 몸줄기를 타고 햇살이 눈부시게 퍼지면 그제야 나는 쓰다듬을 포기하고 그저 감상하게 된다.

다시 2층으로 올라와 뜨거운 물을 부어 찻물이 우러나오길 기다린다. 차분하고 깊은 목소리의 사장님은 물을 다시 채울 때마다 찻잎 우려내는 시간을 늘려가라고 당부하시듯 말씀하셨다. 이번에는 1분 남짓 기다려야 할 순서다. 옥빛 찻잔에 받아낸 갈색 찻물을 보면서, 씹어 삼키지 않는 투명한 액체에 유익한 영양소가 있다는 사실이 의심스럽다. 뜨거운 물에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서 늘어져 누워있는 찻잎을 보면서, 수년에서 수십 년 숙성된 찻잎이 뜨거운 물에 수십 초 만에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버려진다는 생각을 하면 허무함으로 내 몸은 소파에 더 가라앉는다.

‘내 몸뚱이가 찻입이라면’하고 상상했다. 그러면 그걸 마신 나는 입 안에 감도는 불쾌함을 감출 수 없다. 나의 인상을 찡그리게 만드는 불쾌함의 출처는 지난 세월 동안 무책임하게 먹고 마신 것들과 무의식의 생각 고집 습관들일 텐데, 이제라도 책임감을 가지고 정화하려면 살아온 세월의 곱절은 필요하지 않을까. 70년. 곱절의 세월이 까마득하여 멀미가 나지만 곱절만으로 정화가 된다면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하고 위로해 본다.

무책임하게 먹고 마신 탓에 다채로운 맛을 느끼지 못하는 나의 혀를 가만 들여다보면 물 먹인 마분지 같다. 이 혀로 사람들과 차를 마실 때, 내가 느끼는 맛과 타인이 느끼는 맛을 극명하게 대조하여 비교할 수 없으니 나는 나의 미각이 옳은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런 속 좁은 마음으로 김이 올라오는 갈색물을 홀짝여댄지 7개월째, 나는 여전히 차맛을 모르겠다. 홍조 낀 도깨비들이 차오르는 웃음을 참느라 읍, 읍, 거린다.


오전 여섯 시, 요가 수련을 위해 밝은 찻잎, 어두운 찻잎, 작은 찻잎, 큰 찻잎의 사람들이 매트를 들고 수련공간에 들어서면 각자의 맛과 향이 벌써부터 은은하게 퍼진다. 수련이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그들의 고유한 맛과 향은 더욱 진해져 땀과 체취로 배출되는 데, 그러면 넓은 공간은 빼곡하게 충만해져서 서로 충돌하고 섞이지만 결코 시끄럽지 않다. 정말 신기하게도 ‘사바아사나’로 모두가 편안하게 매트에 눕는 순간, 충돌은 돌연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거친 호흡, 흥분한 근육, 붉어진 체온을 가다듬고 나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매트를 돌돌 말아 수련실을 나간다.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다시 흥분하기 시작한다. 차담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새벽 수련이 끝나면 항상 차담이 기다리고 있지만 누구도 서로에게 참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물론 나에게도 강요한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굳이 자리 하나를 꿰차고 앉는다.

각자 앞에 놓인 예쁜 찻잔마다 가득 채워진 따뜻한 액체를 바라본다. 나는 물이 무섭다. 어린 시절에 얼음물을 마시다가 얼음 조각이 목에 걸리는 바람에 얼마 되지도 않는 짧은 인생을 주마등으로 경험하고, 이후 계곡에 놀러 갔다가 경험한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었다. 차담하는 사람들 모두가 여유롭게 몸에 힘을 빼고서 물 위에 둥둥 떠있는 데 나 혼자 찻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느라 호흡이 불안하고 손을 덜덜 떨었다. 사실 이건 내가 스스로 빠진 거라서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어쩌고, 저쩌고” 용기 내서 한마디라도 하고 나면 순간 정신이 몽롱해지고 식은땀이 흘렀지만 다음날에도 나는 자리 하나를 꿰차고 앉아서는 혼자서 또 요란하게 허우적댔다. 나의 불안은 분위기를 오염시키는 능력이 탁월하여 다른 사람들도 쉽게 불편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혼자 남성인 내가 차담 자리에서 그러고 있으니 오죽했을까. 기분 좋게 수다를 떨어야 할 시간에 내가 그런 분위기를 우려냄에 도반분들에게 너무 죄송했다. 너무너무 죄송했지만, 10여 년 동안 나를 괴롭힌 정신질환들을 치유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며 이기적으로 굴었다.


많은 분들이 꼭 성공하고 싶은 아사나 중에 하나로 꼽히는 ‘아사나의 왕, 살람바 시르사 아사나’를 시도하면서 등이 제대로 펴지지 않아 중심을 잃고 앞으로 구르기를 7개월째.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스르륵, 아사나를 성공했다. 엄청난 성취감이나 환희, 보람 등 여러 긍정적인 감정이 올라오긴 했지만 그런 감정들은 수련이 끝나고 일기를 쓸 때에서야 아주 천천히 은은하게 올라왔다. 성공했을 당시에는 오히려 차분하고 적막했다. 살람바 시르사 아사나는 훅! 하고 다가오지 않았고, 은은하게 다가와 나에게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차담도 그랬다. 어느샌가부터 나는 사람들과 함께 웃고 있음을 눈치챘다. 웃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서 또 웃었다. 사람들이 차맛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감상평을 늘어놓는 것에 한 줄 댓글을 달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이제는 괜찮아졌다고는 하지만 하룻밤새 뾰족하게 자라는 죽순처럼 문득문득 불안이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오늘 괜찮아도 다음에 또 불안 등의 감정들에게 시달리기도 한다. 해가 잘 들게 해서 죽순이 자라는 빈도를 줄여가는 수밖에. 죽순 자라 듯 빠르게 괜찮아지면 탈이 난다. (사실 그랬으면 좋겠다.)

집에서 살람바 시르사 아사나를 다시 시도했다. 수련원에서 했을 때처럼 차분하지 못하고 불안정했다. 살람바 시르사뿐만 아니라 모든 아사나가 어제 잘되고 오늘 잘 안되기를 반복한다. 그것을 알기에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오늘 안되면? 내일은 되겠지! 내일도 안되면? 다음엔 되겠지!


“불안이 많이 심하신 게 처음 봤을 때부터 바로 느껴졌었어요.”

요가를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나고 요가 선생님에게서 들은 말이다.

“이분은 계속 나오셨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었고요. 그리고 지금은 많이 편안해지신 게 보여요.”

라고 이으신 말씀에 나는 기분이 좋아서 홍조 낀 도깨비처럼 읍, 읍, 웃음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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