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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원진 Aug 07. 2024

네덜란드 2개의 얼굴 - 1부

암스테르담 여행 2일차


오늘은 「암스테르담 역사박물관」에서 중세 암스테르담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하면서 가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냈다. 초기 네덜란드인들은 왜 하필 강 하구의 늪지를 개간해야 했을까? 내륙으로 조금 들어가면 건조하고 비옥한 땅이 있었을 텐데. 홍수와 범람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질퍽한 습지를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박물관에서 척박한 자연환경을 개척한 인류 도전의 감동적인 역사와 마주했다.      



암스테르담 역사박물관

오늘은 「암스테르담 역사박물관」에서 여행을 시작했다. 역사박물관은 내가 묵었던 숙소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였다. 이곳에서 암스테르담에 대한 놀랍고도 흥미로운 자료를 접했다. 암스테르담 초기 개척사를 다룬 비디오 다큐멘터리였다. 너무도 흥미로와서 몇 차례 되풀이해서 시청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1,100년 경 북쪽에서 사람들이 내려와 살기 시작했다.

게르만 족의 일부로 추정되는 이들은 늪지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습지를 개간하여 농지로 쓰기 위해 제방을 쌓고 수로를 팠다. 물기는 빠졌다.

곧 이어 땅이 주저앉아 버렸다. 땅이 꺼지니 물이 밀려들었다. 제방을 더 높이 쌓고 물도 계속 퍼내야 했다.

기록에 의하면, 여러 차례 제방 둑이 무너져 물이 범람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바닷물과 끝모를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댐을 건축하고, 45개의 장벽을 건설하여 도시를 확장시켰다.

인구는 1625년 추가 운하 건설 후, 20만까지 늘어났다.   


  

1100년 경 지금의 암스테르담

1,100년경 북쪽에서 사람들이 내려와 살기 시작했다. 따듯한 날씨와 비옥한 땅을 찾아 이동해 왔을 것이다. 문제는 거기에는 이미 누군가 정착해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초기 네덜란드인들이 12세기에 이 땅에 내려온 것이 최초는 아니었다. 이미 기원전 57년에도 바타비아족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로마시대 기록이다. 칼과 창으로 중무장한 기사를 앞세운 영주가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로마인들이 지칭했던 게르만족이라는 것이 하나의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라인강 건너편에 살고 있던 민족들을 편의대로 간단하게 게르만족이라고 불렀다. 바타비아족, 코트족, 노르드족, 반달족, 프랑크족, 색슨족 등 최소한 15개 이상의 부족이 라인강 건너편에 살고 있었다.     

라인강 북쪽에 살던 게르만족의 특징은 골격과 체격이 컸다는 것, 그리고 전쟁에 능한 전사집단이었다는 것이다. 헌데, 모든 게르만족이 다 호전적이거나 전사 집단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강어귀 늪지대 매립과 개간

암스테르담 지역에 내려온 사람들. 비옥한 농토를 빼앗기 위해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감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영토전쟁 대신에 이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버려진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 전쟁 대신에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도록 늪지대 개간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선택이 감동적이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네덜란드의 조상이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추정은 오래가지 않아 산산이 깨져버리고 만다. 네덜란드인들의 두 번째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홍수와 침수

저지대 늪지를 개간하여 살기로 했기에 홍수는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1170년 올 세인트(All Saints’ flood) 홍수가 덮쳤고, 이때 지형에 큰 변화가 생겼다. 강물 흐름이 더욱 활발해져서 매립지로부터 물 빠짐이 더욱 용이해졌다. 그 결과, 둑이 건조해지면서 정착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264년에서 1275년 사이에 암스텔강어귀에 댐을 건설한 것을 필두로 도시가 확장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네덜란드 전역에서 홍수와 범람이 끊이질 않았다. 838년 홍수로 2,551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을 시작한다. 1219년 홍수로 36,000명이 사망했는데 ‘세인트 마르셀루스’라고 명명하였다. 어떤 심정으로 홍수에 이름을 붙였을까? 이후에도 50,000-60,000명의 목숨을 세인트 1287년 세인트 루시아 홍수 등 수십 건의 대규모 홍수가 이어졌다. 북극에 접한 북해(North Sea)로부터 연중 차갑고 거센 바람이 불어온다. 특히, 폭풍해일이 제방을 무너뜨려 홍수를 일으키곤 했다.  해수에 의한 홍수가 다가 아니었다. 네덜란드에는 라인강 등 3개의 큰 강 하구가 놓여 있어, 수 세기 동안 수백 건의 홍수가 덮쳤다.     



오늘은 암스테르담 역사박물관에서 시간을 거꾸로 돌려 중세시대 여행을 다녀왔다. 영토전쟁 대신에 늪지를 개간하여 살기로 한 초기 네덜란드인들의 위대한 면을 발견했다.      


네덜란드 역사박물관
암스테르담 역사박물관 내부 전시실
역사박물관 전시관
담락 광장
담락 광장의 인파
운하와 유람선

참고 -

1) 암스테르담

2) 암스테르담 역사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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