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등산용품이나 백패킹 용품을 사기 위해 이용했었던 오케이몰에 접속해서 러닝화를 알아봤다.
입문용 러닝화로 적당한 '브룩스' 사의 '고스트'를 10만 원대 초반에 구입했다. 달리기의 특장점 중 하나는 장비가 단출하다는 것! 짐에서 근력운동을 할 때 러닝 쇼츠를 입었기 때문에 그 위에 속건성 티셔츠를 걸치고 모자만 쓰면 러닝 복장으로 적절했다. 러닝앱으로 인기 있는 런데이나 나이키 런클럽을 사용해 볼까 했지만 에어팟을 끼고 달리는 게 번거롭게 느껴져서 일단 그냥 살살 뛰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첫 러닝에 30분을 넘게 쉬지 않고 뛰어서 5km를 채웠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아닌 걸로 여길수도 있지만 군 제대 후 30년도 더 지나서 이렇게 진심으로 달리기를 해 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고, 나는 달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얼마나 숨이 찬지 알아나 보자고 한 건데 목표 치였던 30분 달리기에 5km를 첫날 달성해 버린 것이다.
'달리기 별 거 아니구마잉...'
이후로 나는 혼자서 격일 간격으로 일곱 번을 더 달리고 당시에 한창 인기를 끌던 지역 러닝크루를 수소문해서 가입했다. 카톡으로 모임 장소와 시간을 공지하는 30대 직장인 중심의 러닝크루 모임은 내가 거주하는 경기 남부에도 여럿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가입한 곳은 근처의 백화점과 콜라보 행사를 하기도 하고 방송 출연도 하는 인기 있는 달리기 모임이었다. 회원들 대부분이 직장인이라서인지 모임 시간은 평일의 경우 대개 퇴근 시간 이후인 저녁 7시쯤이고, 주말에는 아침 식전에 모였다.
내가 너무 나이가 많은 게 아닐까 긴장해서 첫 모임에 참석해 보니 과연 한눈에도 나는 차이가 많이 나는 연장자였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시크하게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고 다행히 나 같은 초보자도 여럿 있었다. 모임의 리더 격인 청년이 정한 시간이 되자 그룹별로 사람들을 출발시켰다.
"430 나오세요."
"다음 500 출발하세요."
사삼공은 뭐고 오공공은 뭘까 싶었는데 1km를 달리는 데 걸리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었다. 즉 500은 1km를 5분에 뛰는 속도의 그룹이고 530은 5분 30초에 1km를 뛰는 속도를 말한다. 그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는데 리더는 530까지 부르더니 나머지는 알아서 조깅을 하라고 말하고는 앞서 출발한 그룹을 뒤쫓아 자기도 달리기를 시작했다.
조깅?
조깅은 천천히 달리는 속도의 그룹을 칭한 것인데 달리기가 익숙한 사람들은 뛰면서 숨이 차지 않게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를 조깅이라고 불렀다. 사실, 저마다 달리면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속도에는 달리기 수준별로 차이가 있기 마련인데 대개 600 혹은 6 분주 이상의 느린 속도를 의미했다.
나와 나 정도의 실력을 갖춘 초보 러너들은 600의 속도로 신도시 내의 하천변을 따라서 뛰었다. 그동안 몇 차례 해봤던 달리기는 혼자서 뛴 것이라 뛰고 싶은 속도로 뛰고 싶은 만큼 뛰다가 멈추었는데 이제는 그룹 달리기이다 보니 그룹과 속도도 맞추고 거리도 정한 만큼 하는 것인데, 같이 달려보니 혼자 달리는 것보다 재미도 있고 속도도 일정해지는 것 같아서 이제 달리기에 입문했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러닝크루 모임을 두 달쯤 다녔다.
밤에 만날 때는 어두워서 나이 든 내가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환한 토요일 이른 아침에도 만나고 여러 번 참석이 거듭되자 젊은 모임에서 내가 불청객이라는 느낌이 슬며시 들기 시작했다. 저희들끼리 달리는 사진을 찍어주거나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 가벼운 대화를 나눌 때에 나는 우연이라고 하기엔 여러 번 소외되었고 나 역시 그들과 섞이기가 쑥스러워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달리기를 시작하기만 기다렸다. 자식뻘 청년들인데 그들도 내가 어렵고 불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내가 사는 주변의 달리기 모임을 알아봤는데 이번에는 회원들의 연령대가 훨씬 다양한 달리기 클럽이 있었다. 회원 숫자도 더 많았고 모임 역시 정기적으로 주중 2회 주말 1회 갖고 있었다. 나는 이즈음 처음으로 마라톤 대회 참가를 신청했는데 10km 대회로 화성시에서 열린 '효 마라톤' 대회였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참가해 보는 첫 대회로 상의에 부착시킬 배번과 기록을 측정해 줄 전자센서가 달린 스티커가 대회 기념품인 티셔츠와 함께 배달되었다. 두 달쯤 달리기를 해보고 혼자서 10km를 달릴 수 있게 되어서 떨리는 마음으로 신청한 대회 참가는 묘한 흥분과 긴장감을 주었다.
대회 당일, 아침 일찌감치 대회장에 도착해 보니 이미 도로는 통제 중이었고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배번을 부착한 채 경기 출발과 피니쉬 장소인 화성시 향남 스타디움 트랙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난생처음 마라톤 대회에 나와 본 나는 그 큰 규모와 많은 사람들, 이런저런 행사와 이벤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갖고 온 짐을 맡기고 신기하게 그들을 구경했다. 5km와 10km, 하프 마라톤 코스로 종목이 나뉘어 있었는데 종목별로 배번의 색깔이 달라서 마주치는 각 사람들이 어느 경기에 참가하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언제쯤 하프 경기에 나가 볼 수 있을까. 과연 내 인생에 풀 코스를 달려보는 날이 있을까. 내 앞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배번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달리는 10km가 보잘것없고 초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출발 시간이 가까워오자 이런저런 인사들의 식순이 이어지고 하프 코스 참가자들의 출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잠시 간격을 마침내 나의 첫 달리기의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터졌다.
나는 달리기를 할 때마다 애플워치로 나의 속도와 심박, 달린 거리 등 내 신체 데이터와 달리기 기록을 확인할 수 있어서 내가 10km를 달릴 때 어느 정도 기록이 나올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대회에서 달리는 기분은 뭔가 혼자 달리거나 러닝크루 팀에서 달릴 때와는 좀 달랐다. 주변에서 응원을 해주는 바람에 좀 기분이 들뜬 것도 있고 여럿이 휩쓸려서 달리다 보니 내 속도보다 저절로 빨라지는 것 같았다.
힘든 걸 느낄 겨를도 없이 긴장 속에 달리다 보니 골인 지점으로 되돌아왔다.
57:04:08
나는 내 기록에 너무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도 하나도 지치지 않고 끝까지 내 페이스대로 달릴 수 있었다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나의 첫 공식 달리기는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