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결에 우중런

런친자만 한다던데

by 채널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달리기를 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러너들 사이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런친자’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달리기에 미친 사람. 그런 사람들은 하루에 두 번씩 뛰질 않나 35를 웃도는 한여름에도 뛰고 영하 15도의 한겨울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의 열정은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물론 나는 아직은 그 정도로 미치지 않아서 날씨를 가려가며 뛰고 몸도 많이 사리는 편이다. 더운 날씨를 피해 새벽녘에 일어나서 뛰고 비가 오거나 날씨가 심상치 않다 싶으면 달리는 날을 미루기도 한다. 그냥 건강을 위한 무리하지 않는 즐거움일 뿐이다.


한 달 전만해도 밝았는데..


그런데 8월 말쯤엔 정말 하루에도 기분이 백번은 변하는 변덕쟁이 여자친구마냥 종잡을 수 없는 날씨가 이어졌다. 해가 쨍쨍하다가도 이내 갑자기 구름이 밀려오고, 소나기가 쏟아졌다가도 금세 또 해가 비추는 그런 날이 많았다. 일기예보는 예보라기보다는 실시간 알림이 된 지 오래였고, 그날 새벽도 비 소식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갑자기 빗속에 들어왔다


여름의 끝자락이지만 여전히 꽤 더운 날이었다. 이제 귀뚜라미가 울고 매미 소리도 점점 안 들리는 거 같아 새벽엔 좀 시원하겠지 싶었지만 아직 어림도 없었다. 그래도 한여름보다는 기온이 2-3도 정도 떨어졌다는 것에 위안을 얻고 운동화 끈을 매고 나왔다.


'음, 역시 아직도 덥네'


습하고 끈적한 더위는 쉬이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그래도 오늘의 루틴대로 가벼운 마음으로 조깅을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이어폰 너머로 무슨 소리가 들렸다.

'꾸르릉'

작지만 묵직하게 퍼지는 소리가 났다. 아니지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들린 거면 크게 난 소린가?


에이 설마 천둥소리일까 싶어서 애써 모른 척하고 그냥 달렸다. 앞뒤로 휘두르고 있는 팔에 물이 한 방울 떨어진 거 같다. 뭐 어디선가 튄거겠지 싶었는데 이내 한 방울이 두 방울이 되더니 점점 옷을 적시고 있었다.


'돌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 짧은 순간에 고민이 멈추지 않았다. 뭐 이러다 조금 오고 말겠지 하고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의 선택으로 나는 원치 않은 우중런, 빗속을 달리는 경험을 해보게 됐다.



여름이었다

사실 젖기 시작했을 때 돌아갔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필 그런 날은 컨디션이 좋아서 멈추기 싫어진다. 결국 소리 없이 적시던 빗방울은 순식간에 장대비로 바뀌면서 안 그래도 어두운 새벽이 더 짙어졌다.


다행히 모자를 쓰고 나와서 눈을 못 뜰 정도는 아니어서 달리는덴 문제가 없었다. 처음엔 비를 맞는다는 게 꿉꿉했지만 마침 더웠기에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니 샤워하는 것처럼 개운하기도 했다. 덩달아 기분도 좋아지고 더위가 주춤해지니 더욱 힘이 나기도 했다.


'이래서 비 오는 날 뛰는구나'

나는 미친 사람처럼 신나서 더 뛰었다. 애매하게 젖으면 짜증 나는데 오히려 홀딱 젖으니 시원하고 더 좋다. 해방감까지 느껴졌다. 그런데 변덕스러운 여름 하늘은 곧 비구름을 걷어냈다. 잠깐은 비가 그쳐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로 인해 습도는 더 올라가 버렸다. 속옷은 물론이고 신발과 양말까지 다 젖어버리니 갑자기 물먹은 몸이 무거워진다.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처음 출발할 때 보다 기분이 많이 다운된다. 차라리 계속 비가 왔다면 시원하게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말이다.


그래도 잠깐이지만 어쩐지 짜릿한 기분은 조깅을 마치고 집에 와서도 오래 남았다. 비를 맞으면서 뛴다니! 아마 어릴 적이나 군대에서 아니면 평소 경험할 일이 있었을까. 상쾌하고 통쾌하다고 해야 하나? 기분이 너무 개운하다고 해야 하나? 기분 좋게 뛰는 심장과 붕 뜨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특별한 아침을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뛰고 싶진 않다. 이렇게 우연히 찾아오는 즐거움이면 모를까 고이고이 아껴 신는 내 러닝화를 젖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월급 도둑



기대되는 겨울


여름을 힘들게 뛰고 이제는 시원해진 아침공기에 뛰니 몸이 가벼워져서 좋다. 시원함이 물러나고 금방 공기가 차가워질 텐데 나는 아직 겨울 달리기는 경험하질 못했다. 여름보다 더 뛰기 힘든 게 겨울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몸도 무겁고 여름보다 다리가 더 굳어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벌써부터 눈 날리는 날 뛰어보는 상상만 해도 멋질 것 같다. 추운 공기 속에서 몸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하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의 느낌을 빨리 경험해 보고 싶다. 아마 겨울이 되어서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날 멍청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이런 경험이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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