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걸 사서 고생한다고 한다
'처서매직'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뜨거운 여름이어도 처서가 지나면 가을이 느껴져 사람들이 붙인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 '매직'이 느껴지질 않는다. 언제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10K 레이스를 준비하면서 하나 더 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바로 퇴근런이다. 대회가 코앞으로 오기도 했고 퇴근길이 아직 덥지만 그 더위에도 퇴근하며 뛰는 러너들을 종종 봤더니 괜히 하고 싶어 지더라. 그래서 퇴근할 때 메고 뛸 가방까지 질러버렸다.(누가 러닝은 돈 안 드는 운동이라 했나!!)
퇴근할 때 아직도 기온은 30도 아래로 잘 떨어지질 않는다. 그래도 그중에 비가 온 후 기온이 슬쩍 내려가고 구름이 껴 있는 날을 장고 끝에 골랐다. 말이 고른 거지 일기예보를 한 시간 간격으로 들여다보며 뛸 날만 기다린 거다.
일기예보가 정확하지 않다 보니 언제 뛸지 몰라 며칠간은 러닝화를 신고 출근하기도 했다. 러닝화를 신고 출근한 날은 너무 덥다던가 갑자기 비가 내려 그대로 버스를 타고 집에 가야만 했다. 그러다가 기온도 괜찮고 구름도 많은 날이 딱 걸렸다. 이때다 싶어 회사에서 바로 옷을 갈아입고 나가기 전에 거울 앞에서 인증샷도 찍어줬다. 스트레칭도 쭉쭉하면서 나왔다. 이제 뛰어서 집까지 가면 된다.
퇴근런
회사에서 집까지는 8km가 조금 안된다. 생각보다 멀지 않은 거리다. 신호등이 좀 있지만 이 정도는 가볼 만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신나게 뛰어갈 생각만 했지 '사람'이라는 변수는 생각을 안 했다.
여기는 서울이고 퇴근시간이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퇴근길 버스나 지하철이 꾸역꾸역 끼어 갈 데랑 느낌이 다르다. 나는 사람들을 장애물처럼 요리조리 피해 가야 한다.
길이 아무리 넓어도 사람이 많으면 내가 비집고 뛸 공간이 생기질 않는다. 앞서가는 사람들이 일렬로 걷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게 된다. 비켜달라고 하고 싶지만 내가 편하자고 다른 사람의 신나는 퇴근길을 방해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걸음 걷고 한걸음 뛰고, 조금 더 가다 보면 신호등에 걸리고.. 그러다가 나중엔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절반정도는 거의 걸었던 거 같다. 아무래도 코스 선택을 잘못했다. 그동안은 잘 정비되어 있는 길만 뛰었더니 집까지 가는 거리만 생각하고 다른 건 고려하질 않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회사랑 멀어지니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어찌저찌 집까지 도착했는데... 1시간 30분이나 걸려버렸다.
역시 운동은 운동장에서 해야겠다. 내가 버스 너머에서 봤던 퇴근길의 러너는 아마 사람들을 뚫고 잠시 뛰고 있는 시점에 내 눈에 띄었나 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다음 퇴근런 경로를 생각했다.
그날 하늘은 참 예뻤다.
두 번째 퇴근런
두 번째로 날씨의 신이 허락하는 날을 기다렸다.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바로 이틀뒤에 구름이 많은 제법 선선한(27도. 여름엔 30도 이하면 선선하다 하는 게 맞다) 날씨였다.
내가 가진 옷 중에 최대한 가볍고 편하면서 출근룩에 적합한 옷을 골라 입었다. 돌아올 땐 새로 산 가방에 넣고 뛰어야 하는데 아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가방이 작기도 하고 일단 어깨에 뭔가 짊어지면 내 몸도 자연스럽게 무거워진다.
퇴근길은 아직도 밝다. 일단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가가 중간에 내려서 뛸 계획이다. 내가 아침마다 뛰는 하천과 이어져있는 하천의 시작점에서 출발할 예정이다. 버스에서 내려서 근처 화장실에 가서 환복 후 바로 뛸 준비를 시작했다.
퇴근할 때, 그것도 금요일의 퇴근은 너무 좋다. 게다가 날씨까지 예쁘니 기분은 들뜨게 된다. 이 기분에 취해서 천천히 발을 내딛고 나아갔다. 사무실에 온종일 앉아 있다가 나왔는데도 기분 탓인지 다리가 가벼운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페이스를 오버한듯하다. 처음엔 가방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지 않았는데 등에 메고 있는 가방의 무게가 어느 순간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하천을 통해서 집으로 가면 돌아가기 때문에 약 10k 정도 되는 거리다.
호기롭게 출발할 땐 언제고 우리 집은 언제 나오는지만 생각했다. 그래도 새로운 코스로 뛴다는 것은 너무 신나는 일이다. 새로운 건물과 나무들을 지나치면서 무거운 어깨와 풀려가는 다리는 애써 잊으려 했다. 설상가상 절반정도 오니 비가 조금씩 내릴 기세다. 비 오기 전의 습도가 온몸을 덮쳤다.
결국, 에라이!
그냥 걷자. 터덜터덜 걸어서 집에 겨우 도착한 날이었다. 역시 일 하고 뛰는 건 아닌 듯하다면서 스스로를 다독이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세 번째 퇴근런
난 항상 새벽에 일어나서 뛰는데 그날 아침은 비가 꽤 많이 와서 뛰질 못했다. 8월은 아직 비 소식이 많다. 어째 올해는 들쭉날쭉하게 비가 많이 오고 일기예보와 다른 날이 많은듯하다.
어쨌든 아침에 못 뛰었으니 퇴근런 당첨이다.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가면 수월할 수 있지만 아시다시피 집에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싫다. 어떻게 해서든 집에 가기 전까지 모든 걸 마무리해야 한다는 요상한 결심이 선다.
오늘은 또 다른 코스다. 한강으로 가기로 했다. 한강으로 가려면 또 회사에서 지하철로 6 정거장을 가야 한다. '이대로 집에 갈까..'
잠깐 생각했지만 오늘 하기로 한 약속은 지켜야지. 또 언제 비가 와서 못 뛰게 될지 모르니까 말이다.
크~~ 이 사진 찍고 혼자 감탄했다.
역시 그냥 집에 안 가길 잘했다. 해가 저물어가는 멋진 저 풍경을 일 년에 내가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이제 점점 해가 짧아져서 같은 시간에 와도 해지는 모습은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 하루가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진다.
다행히 멋진 석양을 보고 뛰어서 그런지 하나도 힘들지 않게 집까지 뛸 수 있었다. 세 번째 만에 가장 즐거웠던 퇴근이었다. 하지만 이 더운 여름에 또 하라고 하면 글쎄다. 여름 퇴근런은 결국 고생 반, 즐거움 반이었다. 하지만 땀 범벅이 되면서 본 하늘과 풍경은 운동장에서만 뛰어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아마 올여름의 퇴근런은 이렇게 기억될 것 같다. 다가올 계절과 내년 여름은 또 어떻게 다를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