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란 Apr 17. 2022

너는 돈 내고 회사 다녀라

얼마를 누구에게 주면 될까?

가장 오래 다녔던 L사 그룹 연수원의 재직 시절, 임원 후보 교육을 맡게 되어 리더십 도서를 읽고 있는 모습을 보고 A 상무님이 툭하고 말을 던졌던 적이 있다.


너는 돈 내고 회사 다녀라.


순간, 욱 하고 노골적인 반감이 들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다른 계열사에서 경력으로 이동한지 두 어달 남짓 밖에 안되었을 시기였고 이분이 나를 뽑아준 임원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것 처럼 네네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아주 자세히 봐야만 눈에 띌 정도의 의아함을 표정에 담아 고개를 돌렸다. 무언의 대답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시냐고. 그 대답을 듣고 A 상무님이 첨언 했다(눈치 빠른 A 상무님은 아마 내 표정을 잘 읽었을 것이다).


회사가 너 공부도 시켜주고 성장도 시켜주는데 돈 내고 다녀야 하지 않겠니?


그로부터 몇 년 뒤, 무슨 일 하세요? 라는 질문에 나는 돈 내고 다닐 법한 일을 하고 있어요.라고 사람들에게 답하며 대놓고 의아한 표정을 유도하는 짓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이 때의 반응을 살피는 일이 나름 재밌기도 하다). A 상무님이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한 장이든 동영상 한편이든 10일 짜리 교육프로그램이든 어떤 컨텐츠를 기획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대한 학습이 필요했다. 전략 프레임워크 한 장을 그리기 위해 전략의 역사와 개념을 깊게 파고 들었고 산티아고 순례길 영상을 편집하며 마치 그 길을 밟아 본 사람처럼 순례의 감동과 환희를 체험해야 했다. 인공지능 철학을 정의하기 위해 모 대학 교수님과의 미팅을 준비하며 열 권 정도의 책을 읽자 나름의 개념이 머릿속에 자리 잡히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데이터 분석 커리큘럼을 만들며 팔자에도 없는 이공계열 MBA에 도전한 것은 수포자인 내게 무모함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공부가 반드시 선행되어야만 하는 이 프로세스는 정말이지 특별했다.(전설같은 여담이지만 어떤 교육 담당자는 탱고 춤을 강의의 메타포로 넣기 위해 직접 배우고 왔더랬다.)


강의 기획으로 얻은 경험 역시 보통 사람 같으면 돈을 냈어야 마땅한 일이 맞다. TV에서도 쉽게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을 직접 찾아 만나가며 방향성과 내용을 상의하고 그들이 만든 컨텐츠를 감수하는 과정에서 여러 인생을 살아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수백명의 리더를 상담한 정신과 전문의가 생각하는 건강한 리더십, 하버드 대학에서 경영전략을 전공한 교수님의 인생관, 심리학을 전공한 웹툰 작가가 평범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법, 국내 최대의 배달 사업 창업가가 전단지를 돌려가며 회사를 시작한 이야기와 같은 강의 안을 가운데 놓고 같은 높이에서 눈을 마주치며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생의 다채로움이 피부로 느껴졌다. 가끔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변하지 않는, 반복되는 루틴으로 가득차 있던 이전의 삶과는 달랐다. 하나의 삶에 오롯이 몰입하면서도 다른 삶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일을 나의 업으로 한다는 것. 이것이 사람들이 흔히 표현하는 일의 기쁨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 나는 회사를 다니며 기뻤던 것이 맞다.


그 시절에는 회사를 출근하기 싫었던 적이 단 하루도 없었던 기억이 난다. 9년 동안 편도 70km 이상을 운전하기 위해 새벽 6시 전에 집을 나섰고 밤 8시가 넘어야 천천히 귀가 채비를 했던 날이 대부분이지만 번아웃 따위는 없었다. 늘 새로운 것을 배우고 경험하는 일이 가장 큰 가치인 나에게 업무로 인한 지침과 소진이라는 것은 멀고 먼 다른 세상의 단어였다. 그렇다. A 상무님 말처럼 나는 돈을 내고 회사를 다녀야 했던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얼마를 누구에게 주면 될까? 고민의 끝에 나의 성장을 셈 해본다.




그런 작가가 수영장에 던져졌던 일화가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chanrran/37


작가의 짧은 글이 궁금하다면

https://twitter.com/chanrran




image source : https://unsplash.com/photos/TamMbr4okv4

이전 01화 아, 일하기 싫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