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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Aug 20. 2022

돈은 있는데 재미는 없고, 인생 참...

이른바 노잼 시기

일단 제목에 쓰여 있는 ‘돈은 있는데’는 돈이 엄청 많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오해가 있을까 봐 혹시 몰라 이렇게 글 맨 앞에 적어 놓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으면… 재미있겠죠. 뭐.




이른바 ‘노잼’ 시기라는 것은 매우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주기가 짧아질 때도 있고 길어질 때도 있지만 쉬지도 않고 아주 성실하고 착실하게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것이 노잼 시기다. 꼭 안 좋은 것들이 그렇게 꾸준하더라고. 여하튼 나이를 먹을수록 주기가 짧아지는 것 같은데, 착각이면 좋겠다. 제발.


어릴 때도 노잼 시기는 있다. 그런데 어른의 노잼 시기는 어린이 또는 청소년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아이러니하다는 것이다. ‘돈은 있는데 재미는 없는’ 것이다. 어릴 땐 돈이 없어도 뭘 하든 재미있었고, 노잼 시기가 살짝 찾아와도 돈이 조금 쥐어지면 금세 재미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유치원을 다닐 무렵에는 운동장에 쌓인 흙더미만 봐도 신이 난 강아지 마냥 뛰어가서 미끄럼을 타고 땅굴을 팠다. 마치 건축 설계사가 것처럼 신중한 눈빛으로 흙에 물을 뿌려 경도를 맞춰가며 터널을 만들고 그 사이로 손을 넣어 안전시공(?)을 확인하고 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땐 흙도 좀 주워 먹었겠지. 개미나 사슴벌레만 구경해도 한두시간이 금세 지나가던 그런 때가 누구나 다 있다.


흙더미는 그래 딱 이런 느낌


초등학교 때는 그냥 친구들끼리 몰려다니기만 해도 재미있었다. 백 원짜리 몇 개면 오락실에서 신나게 놀았고 다른 친구들이 하는 걸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체육시간마다 선생님이 뻥 하고 차주는 공에 시작되는 축구는 1시간이 10분 같았다. 복잡한 룰도 필요 없었다. 포지션도 없고 규칙도 없이 그저 신이 났다. 비가 오면 더 신이 났다. 온몸이 홀딱 젖고 진흙탕에 뒹굴면 깔깔거리는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참 행복한 기억이다.


중학교 때는 정신없이 책을 읽었다. 정말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댔다. 소설, 에세이, 시집, 만화책까지 한번 손에 잡으면 3~4시간은 금방 흘러 있었다. 그 두꺼운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 5권 전권을 3독 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퇴마록도 읽고 판타지도 읽었다. 아, 그 무렵에는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가 한창 인기몰이를 했던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도 아마 그 쯤 처음 읽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는 사촌 형들과 농구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80년과 83년에 각각 태어난 사촌 형 둘과 85년생인 나까지 셋이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며 마치 도장깨기를 하듯 3:3 농구를 했다. 주말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농구는 해가 저물고 운동복이 땀에 절고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가 되어야 끝이 났다. 참 재미있었다. 늘 주말이 기다려지고 농구공만 봐도 두근거렸다.


돈? 그 시절에 돈이 뭐가 필요 있었을까. 운동상에 쌓인 흙더미를 가지고 논다고 누가 돈을 받지 않았고 하루에 용돈 천 원만 받아도 충분했던 초등학교 시절이 있었다. 중고등생이었을 때는 좋은 농구화나 운동복이 갖고 싶었지만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사실 키... 큰 키가 필요했다!) 점심때 컵라면 먹을 돈과 농구를 끝내고 나서 이온 음료를 사 먹을 돈 정도만 있으면 하루를 즐기기 충분했다. 아, 그때는 그냥 운동장에 있는 수돗가에 입을 대고 콸콸 떨어지는 물줄기에 목을 축이고 머리도 감고 그랬다. 사실 이온 음료도 사치지 뭐.


그렇게 어릴 땐 뭘 하든 재미있었다.
그런데 어른이 된 지금은 이상하다. 
돈은 있는데 재미가 없다.

그렇게 갖고 싶던 플레이 스테이션이나 닌텐도도 그냥 쳐다보기만 할 뿐 시큰둥하다. 휴대폰에 게임 앱이 없던 지도 한참 된 것 같다. 사놓고 읽지 못한 책은 늘어가고 농구공에 손을 안 댄지는 몇 년이 흘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어른이 되면 꼭 갖고 싶던 20만 원이 넘는 나이키 농구화를 봐도 그냥 덤덤하다. 언제든 살 수 있는데도 그렇다. 심지어 매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 로켓 배송을 해주는 어플을 열고 한 두 번 정도 클릭하면 결제까지 끝나고 내일 아침 7시 전에 우리 집 앞으로 최신형 게임기가, 농구화가, 심지어 최신형 맥북도 도착한다. 그런데 나는 내키지가 않는다. 뭐, 결론은 뻔하다는 것이다.


노잼 시기는 나에게 인생이 뻔하다고 귓속말한다. 그거 해봤자 뻔해, 알잖아? 다 해봤잖아?라고 말한다. 으으. 이런 소리는 귀를 막는다고 안 들리는 게 아니다. 말이 귓속말이지 사실 마음속에서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결국 노잼 시기의 우리에겐 ‘뭔가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들 여행을 떠나나 보다. 누가 그랬던가, 인간은 감탄하기 위해 산다고. 어쨌든 여행이라는 수단을 통해 새로운 것과 마주하고 감탄하고 낯설어하다 보면 모든 게 유잼으로 바뀐다. 코로나가 창궐하고 수많은 사람이 병원 신세를 져도 인천공항과 서울역이 늘 북적이는 이유다. 


그리고 사실 유잼은 체력이나 감정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그래서 유잼을 계속하다 보면 다시 노잼을 찾게 된다. 이때 찾는 노잼은 따분하지 않다. 익숙하고 자연스럽고 평온하고 평화로운 것이기 때문에 재미가 없어도 상관없다. 익숙한 내 방과 내 침대가 그립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대는 주말의 오후가, 낮잠이, 커피 한잔이 너무나 좋아지는 것이다.


이 사진이 따분하면 노잼 시기, 평온하게 느껴지면 '안' 노잼 시기


인생은 참 이상하다. 백 년도 못 사는 이 짤은 생에 ‘노잼 시기’가 있다는 것도 참 이상하다. 돈이 없는 어릴 땐 뭐든 재미있다가 어른이 되어 돈이 생기면 재미가 없어지는 게 이상하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돈이 엄청 많다는 것은 아니다. 아, 돈이 엄청 많지 않아서 재미가 없는 것일까? 


스포츠카를 사고 빌딩을 사고 전세기가 있으면 노잼 시기라는 것이 없을까?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지 않은 나는 모를 일이고, 지금 슬슬 찾아오려고 하는 노잼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렇게 글을 써 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다행이다. 글을 쓰다 보니 조금 재미있어졌다. 끝.




image source

- main: https://unsplash.com/photos/PrLyjFQgldw

- 흙더미: http://www.peaceflower.org/bbs/board.php?bo_table=sc01_03_teacher&wr_id=808

- 침실: https://unsplash.com/photos/3N26kH--T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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