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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형 Feb 01. 2022

밤과 한 사내


푸르름을 걸쳐 입은 초저녁이

흐릿한 반달을 들어 올렸다


멀리 산등성이가 짙은 먹선으로 남고

숲의 나무들은 마른 잎 몇 장으로

어둠 속에서 몸을 가렸다


덤불 사이로 분주히 날던 참새떼도

밀물처럼 차오르는 어둠잠겼


밤은 사람들의 동네를 배회하며

유리창 너머로 어둠을 밀어 넣었다


골목 끝 집 탁자에 앉은 사내는

익숙한 듯 검은 밤과 악수를 하고

맞은편 의자를 내어주었다


사내는 수증기가 어린 잔을 메만지며

밤의 이야기가 시작되길 기다렸


밤은

검푸른 바다와 하늘,

칠흑 같은 동굴과 심연,

어두운 대지와 밤짐승들,

눈을 감고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묘사


밤이 나즉한 목소리로

어둠속에서 빚어지는 탄생과 죽음을 읊조리자

사내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어둠으로 장식한 밤의 여로는

얼굴에 새겨진 주름만큼이나 굴곡졌다

사내는 말없이 밤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잠시 말을 멈추었던 밤이 손을 흔들자

먹빛 하늘에 회색 구름이 퍼지고

반짝이는 얼음 조각들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겨난 눈은

골목안과 큰 거리에 가득 찰 때까지

피어나기를 멈추지 않았다


사내는 이윽고

창백한 표정의 밤이

흰 눈 위로 어둠의 망토를 끌고 사라진 후에도 

한참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 새해 첫날 자정에 눈이 내린다.

희뿌연 눈빛에 어둠이 한결 사그라들었다.

소리 없이 도둑처럼 밤새 내리는 눈.

앞마당과 지붕 위로 수북이 쌓이던 눈.

그 눈이 다시 찾아온 것일까?

그러나 옛 설레임은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없다.


눈송이 하나가 나풀나풀 춤추며 내려와서

이마에 내려앉는다.

순간 차가움이 머리의 열기를 식혀낸다.


수많은 밤의 이야기들 중 이런 날도 있다.


(밤의 여신이 뿌려주눈꽃송이들이

전화기 너머의 우울한 목소리를

어루만져 덮어주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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