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왕이면 슬픈 일만 내게 주렴
첫날의 기쁨일랑 지워 버리고
쓰디쓴 오이 꼭지처럼
뱉어내고 싶은 기억만 내게 다오
다음에는 아주 단단해질 줄 알았는데
무너지는 것은 더 쉬워졌어
흙벽으로 세운 사랑이기에
새벽안개로 지탱하는 하루
뿌연 장막이 걷힐 때마다 두려웠지
쨍쨍한 한낮은 인고의 절정
가뭄이 길었는지
깊어만 지던 우물도
마침내 펌프질을 거부했어
메마른 낮을 조문하고
밤을 더 검게 칠하려면
슬픈 일 한가지로만 치장해야 해
넋 나간 빈 가슴아
날카롭게 조각난 슬픔만을 품으렴
* 지난밤, 박정만 시인의 <슬픈 일만 나에게>가 조용히 카톡방으로 찾아왔다.
슬픔은 시인의 숙명 같다.
아니 사람의 그것이겠다.
하루 지나니 우리는 같은 길 위에 서 있음을 알게 된다.
보내준 이에게 또 한 편의 시가 위로가 될지 아니면 쓸모없는 끄적임이 될지는 미지수다.
장마를 알리는 첫 비를 맞으러 나갔다.
비가 오다 그쳤다를 반복하며 먼 산 위로 운무가 피어오른다.
사람의 일도 오늘처럼 늘 한결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