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의 은은한 체취: 인간성, 교육성

교육으로 가는 역사학 내비게이션 6장

by 샤를마뉴

이 장에서는 역사학의 '교육적 특성, 교육자적 자질'을 고찰한다. 역사학은 인문학의 한 분과로, 인간의 궤적인 역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역사의 이해는 곧 인간의 이해이며, 인간의 이해는 곧 교육의 이해로도 연결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의 이해와 인간, 교육의 이해 간에는 정비례의 관계를 가질까? 정비례하다면, 역사학을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교육자'가 되는 첫걸음일 수 있다. 이렇게 일종의 가설이 설정되었다. 이 가설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알려면, 역사학에서 인간을 위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도야하는 기질이 내재되었는지, 그 기질을 교육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사람은 여러 요소로 규정된다. 쉽게 말해, 배경(집안, 학교 등), 관심 분야, 직업 등에 따라 사람에게 개성이 생긴다. 미술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상상력이 풍부할 것이고, 연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은 무엇을 탐구해내려는 끈기가 있을 것이다. 직업의 특성이 사람의 특성으로 전이되고, 자질이 되기도 하는 간단한 사례이다. 역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도 당연히 고유한 특성과 자질을 지닌다. 필자는 교육이 역사학을 배우는 사람의 고유한 특성, 자질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학자가 곧 역사 교육자이기도 하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기도 하고, 일반 대중을 위해 역사 교양서를 쓰기도 하고, 초중등 역사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기도 한다. 역사를 공부하고, 업으로 삼으면 자연히 교육으로 손을 뻗는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봤을 때, 역사학은 꼭 '단일'한 특성을 띄지는 않는 것 같다. 역사학을 '혼합 학문'으로 규정하고, 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교육과의 혼재가 그 근거이다.

학(學)은 넓은 의미의 교육이다. 학문은 어떤 지식,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이므로 교육적 행위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어떻게 보면, 학문의 종착지는 교육일지도 모른다. 학문을 하나의 생애 주기로 구분해보자. 그렇다면 학문에는 탄생, 발전, 성숙의 단계가 존재할 것이다. 전문가에 의한 연구는 학문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고, 교육은 학문이 성숙되었다는 자격을 부여한다. 교육에게도 학문은 필요하다. 교육의 원초적 역할은 '지식의 전달'이다. 이 원초적인 역할 없이 교육이 성립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성숙한 학문은 교육의 훌륭한 밑거름으로써 요긴하다. 학문이 교육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교육의 핵심적인 한 축을 구성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결론적으로 교육과 학문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고 연결된다. 학문에서도 교육적 바탕이 창출되고, 교육에서도 학문적 바탕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학문에서 교육으로의 전이가 곧 넓은 의미의 교육이기도 하다. 이 글은 역사학과 교육의 관계를 다룬 글이지만, 타 학문에 관심이 있거나 전공하는 사람들에게도 교육과의 관계성을 생각해보는 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필자는 이전에도 이 글의 주제와 유사한 글을 썼다. 이전 글에서는 교육과 인문학이 제도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혔다. 이 글을 읽기 전에 참고하면 좋다.

https://brunch.co.kr/@charlemagnekim/12


1. 역사학과 인간성의 관계

역사학에는 인간성이 내재해 있다. 필자는 역사학에서 인간성을 배양하는 주요 원천이 '내면적인 사고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역사학 공부는 그렇게 많은 소통을 필요로 하진 않는다. 그리고 역사학계에서의 주요한 소통 수단은 글이다. 혼자 역사학을 탐구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다가, 필요할 때만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해도 큰 문제가 없고 도리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렇게만 보면, 역사학 공부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보편적인 공식과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역사학 공부는 '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각하는, 주체적인 삶을 사는 자세를 배양시키기도 한다. 혼자 무언가를 사고하고 골몰하는 역사학 공부의 특성이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계기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주체성이 견지된 인간은, 개인적으로는 더 행복하고 열정적인 삶을 사는 자세를 얻으며, 사회적으로는 선(善)을 지향하는 구성원이 될 수 있다. 역사학은 사람에 따라 삶의 방향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조력자가 되어준다.

'꼭 역사학만이 인간성을 일깨우는 학문인가?'라는 반문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반문은 타당하다. 역사학이 아닌 다른 학문도 개개인에 따라 인간성을 배양하고, 삶을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역사학이 인간성을 배양하는 데 특히 도움이 되는 두 가지 이유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 역사학은 순환성과 교훈을 '인간의 발자취'로 보여준다.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문구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대, 지역, 문화권이 다를 뿐 역사상의 왕조는 흥망성쇠의 길을 걸었으며, 권력자는 권력의 정점을 맛본 뒤 어느 순간 뒤안길로 사라지기도 했다. 역사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교훈을 남긴다. 이 교훈은 개인이든 사회든 인류든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유용한 지침으로 작용한다.

둘째, 역사학은 방대함, 불완전함, 학자들의 다양한 이견으로 '오만한 태도'를 방지한다. 오만함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롭지 않으며, 불행을 낳는다. 오만함의 근원은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라는 착오적인 발상에서 비롯된다. 역사상의 왕조 그리고 권력자가 몰락한 이유에는 높은 확률로 오만함이 있었던 게 원인이다. 그것이 반면교사의 교훈이 되기도 한다. 한편, 역사는 기록을 통해 과거의 모습을 제한적이고 불완전하게 재현한다. 기록으로 나타난 역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렇기에 해석이 필요하고,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역사학은 지금의 세상에 전해지는 모든 역사와 그것에 대한 해석의 방대한 집합이다.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역사 전문가'인 교수님들조차도, 자신이 전공하지 않은 분야의 역사에 대해서는 '모른다.'라는 입장을 확실히 밝히고 말을 아낀다. 역사학 공부를 통해 겸손한 태도가 자연스럽게 체득된 증거이기도 하다. 겸손의 사전적 정의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이다. 남을 존중하는 것은 곧 관용이고, 이것이 더 인간적인 세상을 만든다.

역사학의 관점에서 인간성을 정의하자면,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너그러울 줄 아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역사학은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볼 수 있는 학문이다. 어떤 사소한 잘못이 큰 화근이 되었다든지, 열심히 노력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목표가 있었다든지 이런 것들을 우리는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 한계를 인정하고 더 완전한 상태로 나아가는 해석을 내놓는다. 이처럼 인간은 시간 그리고 역사 앞에서 무력하므로, 사실 강박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그런데 지금의 세상은 강박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게 만든다. 개개인의 삶에 일괄적인 기준을 정하고, 그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는 게 일반화되었듯이 말이다.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다면, 한계를 인정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계를 인정해야만 한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개개인에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재능으로 만들 수 없는 것도 있으며, 인간은 의식주가 보장되지 않으면 삶과 건강이 망가진다. 불가역적 한계인 셈이다. 현대 사회는 은근히 불가역적 한계까지 뛰어넘으며 성공을 쟁취할 것을 조장하고 있다. 그렇게 얻은 성공이 개인의 삶을 윤택히 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풍토가 되면 이 세상은 비인간적이고, 한치의 오류도 인정하지 않는 삭막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그런 세상은 행복과도 거리가 멀다. 이 점에서 역사학은 현실적인 학문이다. '인간의 기계화'라는 허상을 제어하고 인간을 정확히, 현실적으로 직시하게 해준다.

이상으로 역사학의 이해가 곧 인간의 이해로 이어지는 데 상당한 영향을 준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역사학은 학문 자체의 특성에서 인간성이 내재해 있고, 역사학을 공부하는 개인에게 인간성이 전이되기도 한다. '역사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인간적이다.'라는 명제를 설정했을 때, 이를 보편적인 명제로 설정하기에는 무리수가 있지만 참이 되는 개별적인 사례를 상정하는 건 가능하다.


2. 역사학과 교육성의 관계

역사학의 인간성을 어떻게 교육으로 끌어들어야 할까? 이것이 역사학과 교육을 연결하는 핵심 질문이다. 그러기 위해 교육의 특성을 고찰하고, 역사학과 비교 분석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교육의 사전적 정의는 지식, 기술 등을 가르쳐 인격을 길러주는 것이다. 즉, 교육의 최종 목표는 피교육자에게 지식을 하나라도 더 집어넣는 게 아니라 인격적 성숙을 가능케 해야 한다. 교육자에게는 어떤 지식에 대한 전문성, 지식을 교육에 활용할 수 있는 능력, 피교육자에 모범이 될 인성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교육은 대단히 복합적인 요소가 정교하게 결합되어야 제 기능을 발휘한다. 학문은 앞의 세 요소 중 첫 번째 요소에는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런데 두 번째 요소와 세 번째 요소는 교육의 고유한 영역이어서, 학문이 이를 구현하기에는 어렵다. 따라서 역사학에 인간성이 내재된 것이 곧바로 탁월한 역사교육을 가능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역사학이 교육 방면에서도 훌륭한 역할을 해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원전 구절]
교육이란 혼의 지적 기관을 어떤 방법을 써야 가장 쉽고 가장 효과적으로 전향시킬 수 있는가 하는 기술이지, 그 기관에 시력을 넣어주는 기술이 아닐세. 그보다는 오히려 그 기관은 시력을 갖고 있는데도 방향이 옳지 못한 나머지 보아야 할 곳을 보지 못하니 이를 연구해서 시정하는 기술이라고 할 것이네.

[해석]
플라톤은 위의 구절을 통해 교육의 근본적인 역할을 정의하였다. 그는 이미 지식을 받아들일 능력이 있는 지적 기관(사람의 두뇌)에 또 다른 지식(시력)을 주입하는 건 교육적으로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보았다. 지적 기관이 올바르지 못한 방향을 추구할 때 이를 바꿔주는 게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라고 보았다. 가령 방향을 인격으로 가정한다면, 인격은 지식의 축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닌 삶을 살아온 방향에 따라 나타난 결과물이다.

- 플라톤, 『국가』, 천병희 역, 숲, 2013, p.403(원전 기준 - 518b).

결국 역사학에 '교육자적 자질, 교육적 장치'가 없으면 무용한 학문이 될 수 있다. 오히려 역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인격적으로 형편없다면, 역사학은 교화의 수단이 아니라 위험한 무기가 된다. 역사학이 개인 그리고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능하려면, 올바른 교육이 선행되어야 하겠다. 학문 자체가 교육의 기능을 완전하게 수행하지 못하는 한계점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인간이 되어라.'가 괜히 격언인 게 아니다.

역사학의 강점이 반드시 교육의 강점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역사학을 교육의 영역으로 끌어올 때는 현실적 타협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 가령 '교육과정'은 피교육자가 '어떤 단계에서는 어떤 수준까지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척도를 표준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초중등 역사교육에서는 역사의 교훈적 성격은 교육 목표에 반영할 수 있지만, 역사학 고유의 특성인 '역사의 불완전성', '학자들의 해석'을 온전히 반영하기에는 어렵다. 역사학의 학문적 특성이 초중등 역사교육의 눈높이에 들어맞지는 않기 때문이다. 학문적 특성을 일부 포기하는 게 도리어 초중등 역사교육에 적절한 것이다. 다만, 이런 현실적 타협이 마음에 들진 않는다. 학생들이 역사를 '사실 나열의 집합'으로 받아들이기 십상이고, 단순 암기의 방법으로 공부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지만 교육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갖추면, 역사학의 강점을 교육에 유연하게 녹여낼 수 있다. 이 점은 역사학자가 단순히 연구의 역할만 수행하지 않고 교육의 역할에도 충실해야 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사실 역사학자의 능력을 가늠하는 기준은 연구이지 교육은 아니다. 이 때문에, 학창 시절 때 역사에 흥미를 느꼈던 학생들이 대학 역사 수업을 듣고 실망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물론 학생 교육에 관심이 많은 교수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학생 교육에만 관심을 쏟자니, 연구에 소홀해지는 문제점도 있다. 그래서 역사학에서 연구와 교육이 따로 노는 현상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교육적 활동도 연구와 동등한 가치의 성과로 인정하는 게 첫걸음일 것 같다. 그러면 역사학자, 역사 전공자들 사이에서 교육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기존보다는 훨씬 고취될 것이다. 역사 전문가가 교육을 이해하고, 교육계에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야 역사학, 역사교육 모두가 발전할 수 있다.

차세대 역사학은 '교육자적 자질을 극대화하는 역사 공부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 고민의 필요성은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다. 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역사교육 외에도 여러 형태, 여러 방법의 역사교육이 더 생겨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미래에 대비하려면, 역사학과 교육의 상호 작용이 촉진되어야 한다. 역사학은 학문에 내재된 인간성과 전문성을 교육에 전이하고, 지식을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능력, 교육에 대한 실무적 지식과 경험을 교육으로부터 취해야 한다. 역사학과 교육의 긴밀한 결합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사학과도 역사교육과에 준하는 교육의 기능을 담당해도 되는지에 대한 합의, 교육과정의 대대적 개편 등 오랜 시간을 두고 검토할 문제가 뒤따른다. 그래도 고민해야 한다. 현 시대는 '융합'을 추구하는 시대이며, 역사학도 맹목적인 전통의 추구보다는 현실에 맞는 수정적 방법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 수정적 방법 중의 하나가 '교육 지향적 역사학'이 될 것이다.

이상으로 역사학의 이해가 반드시 교육의 이해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역사학 공부로 인간성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더라도, 훌륭한 교육자가 되는 건 별개의 문제라는 뜻이다. 이 인과관계조차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 역사학 공부를 하는 사람 자체가 인격적으로 심한 결점이 있다면, 역사학에 내재된 인간성이 '교화'의 기능으로 작용하지 못할 것이다. 훌륭한 교육자 역시 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역사학자가 곧 훌륭한 역사 교육자가 되려면, 개인적으로는 성숙한 인격을 가져야 하고 사회적으로는 교육의 고유 영역을 제대로 배우는 기회가 열려 있어야 한다. 지금의 역사학과 교육이 아주 연결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긴밀하지는 않다. 더 긴밀히 연결되어야 한다.


3. 나가며

이 글은 굉장히 사소한 의문에서 시작된 철학적 고찰이다. 필자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한결같이 듣는 말이 있다. '학자 인상이다.', '교수님 하면 어울릴 것 같다.'라는 말을 듣는다. 가족이건, 사학과 동기던, 초면인 사람이던 하나같이 그런 말을 필자에게 했다. 물론 사람들의 반응을 이해한다. 필자의 외모가 안경을 쓴 진지한 사람의 모습이기도 하고, 역사 하나에 대해 누구보다 깊은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역사학을 공부할 때 개인에게 주는 영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철학적 고찰의 깊이를 더 해 준 건 두 가지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는, 대학 수업이다. 교수라는 경칭이 붙는 학자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학자들이 학문을 다루는 태도, 학자들의 교육 방식에는 이미 익숙했다. 지루한 강의도 있었지만, 훌륭한 강의도 있었다. 후자의 강의를 들으면서 든 의문은 '분명히 학자는 연구에 매진할 텐데 어떻게 교육도 잘할 수 있지?'였다. 이 의문은 '학문을 제대로 배우면 교육을 잘할 수 있는가?'라는 또 다른 의문으로 연결되었다. 이것이 학문과 교육의 관계성을 고찰하게 된 배경이다. 다른 하나는, 학원 집필진 경험이다. 필자는 상당한 회차의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세계사 모의고사 출제를 담당했었다. 출제의 관건은 학문적 지식을 교육과정 내 지식과 합치시키는 것이다. 이 관건을 충실히 따르면, 교육과정을 준수하면서도 학문적 지식이 실용적이고 정교하게 활용된 모의고사가 완성된다. 학문과 교육의 접점을 찾았던 모의고사 출제 작업이 학문과 교육의 관계성이 확실히 있다는 걸 알게 해준 경험이었다.

때로는 사소한 의문에서 시작된 사유, 성찰이 작게는 개인, 크게는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이 글이 그러한 글이 되었으면 한다.


평가원 모의고사/수능 출제에 있어서 학문과 교육의 접점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는 아래 글에서 상세히 설명하였다. 참고 바란다.

https://brunch.co.kr/@charlemagnekim/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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