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육에 심는 사료비판 II: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교육으로 가는 역사학 내비게이션 10장

by 샤를마뉴

이 장에서는 사료비판을 역사교육에 적용하는 실제를 구현해본다. 지난 장에서는 사료비판의 몇 가지 특성을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그 필요성을 밝혔다. 이것이 선결되어야 사료비판을 역사교육과 연결하는 방법론을 구축하기 쉬워진다. 보통 사람들에게 막연하고 어려운 개념(단어)은 '번역'의 과정이 있어야,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유연하게 교육시킬 수 있다. 사료비판도 이에 해당할 것이다. 학문은 지식의 저변을 넓히는 과정이고 교육은 지식을 보통 사람에게 전달하는 과정으로 정의했을 때, 학문과 교육을 이어주는 과정은 무엇으로 정의될까? 그리고 그 과정은 누가 해야 할까? 답변하자면, 그 과정은 번역이고 학문의 세계와 교육의 세계를 모두를 이해하고 드나드는 번역가가 책무를 짊어져야 한다. 사료비판이라는 학문적 개념을 교육의 세계에서도 통용되게 번역했다면, 이제 활용해야 한다. 학문의 세계와 교육의 세계 간의 접점을 찾고, 본격적으로 교육의 세계 속에서 학문적 틀을 도구로 쓸 차례이다.

본론에서는 두 가지의 사료비판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사료비판의 사례는 굉장히 다양하지만, 글의 취지와 필자가 설명할 역량에 맞게 두 가지의 사례를 엄선하였다. 필자는 이 사례들만 소개하더라도, 사료비판과 역사교육을 연결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소개할 사례는 십자군 전쟁 시기 유럽 측 사료와 이슬람 측 사료 간의 기록 차이, 한국전쟁(6.25 전쟁) 시기 혁혁한 전공을 세운 심일 소령에 관한 의혹이다. 전자의 사례는 십자군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문화권)에 따라 서술상의 차이가 생긴다는 점, 후자의 사례는 명확한 기록을 남기기 어려운 특수한 상황(전쟁)에서 사실 왜곡이 범하기 쉬워진다는 점을 잘 알려준다. 독자들은 두 사례를 살펴보면서 '사료비판, 역사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자세'의 필요성을 깨닫고, 이것을 교육할 때 역사교육의 본령이 실현되고 지평이 넓어진다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


1. 앞면만 봤던 십자군 전쟁: 유럽의 시각을 넘어 이슬람의 시각으로 보기

십자군 전쟁은 서양 중세사에서 비교적 잘 알려진 사건이다. 어렴풋이 배웠다면, 십자군 전쟁은 그리스도교(기독교)를 대표하는 유럽 세계와 이슬람교를 대표하는 서아시아 세계가 대립한 전쟁이라는 정의도 내릴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군 전쟁은 서양 중세사의 주요 사건이면서 동시에 서아시아(이슬람) 중세사의 주요 사건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육에서 십자군 전쟁은 서양사의 범주로 취급한다.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십자군 전쟁에 관한 서술을 '유럽, 아메리카 지역의 역사(2015 개정 교육과정 기준)' 단원에 수록하였으며, 대학 수업에서도 서양 중세사라는 강좌명 아래에서 십자군 전쟁을 다룬다. 이렇듯 십자군 전쟁은 유럽과 서아시아가 밀접히 접촉했기에 양쪽의 시각에서 들여다봐야 하는 사건이지만, 한쪽의 시각에서만 교육하는 형편이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십자군 전쟁을 어떻게 바라볼까? 그들에게는 유럽이 일방적으로 침략한 전쟁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십자군 전쟁의 초기 양상이 증거이다. 유럽은 십자군 원정을 통한 성지(예루살렘) 탈환을 명분으로 내세워 '결집'했지만, 이슬람 세계는 유럽의 결집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유럽과 이슬람 세계가 십자군 전쟁에서 '누가 승자가 되는지 팽팽히 맞붙어보자!'라는 합의를 했다면, 이슬람 세계의 대응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당시의 이슬람 세계가 분열되었기에 유럽의 결집만큼의 응집력을 키우기 어려웠던 요인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이슬람 세계에서의 십자군 전쟁에 대한 인식은 유럽에서의 인식과 대치된다는 점이다. 유럽에서는 성전(聖戰)이었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전쟁 초기까지는 유럽의 침탈이었을 뿐이다. 결국 십자군 전쟁에 관한 상반된 두 가지의 인식이 존재한다. 지금의 우리나라 교육에서는 이슬람 세계의 시각으로 십자군 전쟁을 바라보게 했을까?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나라에서 이슬람은 어려운 대상이다. 어려운 대상이기만 하면 다행이다. 부정적인 인식이 상당 부분 내재해 있다. 이슬람의 이름으로 무장한 단체가 저지른 테러들이 부정적인 인식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그래서 이슬람 세계는 중세 시기 중국과 함께 세계를 주도했던 문화권이었음에도, 테러로 대표되는 색안경이 과거의 찬란함을 빛바라게 만들었다. 십자군 전쟁에서 유럽 세계의 면모를 부각하면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지만, 이슬람 세계의 면모를 부각하면 '저 사람은 이슬람교를 옹호하나? 좀 의심이 가는데?'라고 반응할 사람이 아예 없다고 말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이 부정적 인식에 더해 언어적 어려움, 문화적 낯섦이 이슬람 세계를 바로보는 시선에 짙은 안개를 드리운다. 역사학 그리고 역사교육에서 십자군 전쟁을 다룰 때 서양 일변도적인 시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1)
인류 역사에서 십자군 전쟁만큼 그 진실이 감추어진 역사적 사건도 흔치 않을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이교도에 유린당하는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고자 하는 고귀한 종교적 열정에서 비롯된 성전으로 정의되어 왔다. 그래서 십자군의 영어식 표현인 Crusade는 성전(聖戰)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적어도 유럽 기독교 입장에서는 그렇게 포장될 수 있었다. …(중략)… 이슬람의 입장에서 보면 십자군 전쟁은 유럽인의 침략 전쟁이고, 이방인들이 저지른 대학살과 약탈로 삶이 짓밟힌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고 반문명적인 사건이었다.

- 아민 말루프,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김미선 옮김, 아침이슬, 2002, pp.5-6(책 추천 글).

(2)
21세기를 전후하여 최근까지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충돌이 세간의 관심을 끌었지만, 이에 대한 설명은 주로 유럽인의 시각에서, 그것도 당대인의 기록보다는 연구서에 기반한 것이었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에 속하는 당대인의 기록을 직접 읽음으로써 십자군을 균형 잡힌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중략)…
유럽인이 바라보고 기록한 십자군의 역사와는 달리, 이슬람의 관점에서 바라본 십자군은 사뭇 다르다. 우선 십자군에 관한 기록이 유럽에 비해 크게 부족한데, 이는 이슬람 세계 전체로 본다면 십자군의 활동이 좁은 지역, 심하게 표현하자면 변방에서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유럽인들에게 십자군이란 전 유럽이 떠들썩했던 사건이었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유럽에서만큼 큰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2001년 9.11 사태 이후 이슬람과 서구 기독교 진영의 대립 구도에 관심이 모아지면서 최근 몇 년간 국내에서는 십자군 전쟁 관련 해외 저서들이 번역되어 소개된 바 있다. 그 저서들은 나름대로 십자군 전쟁의 진상을 파악하려는 목적을 띠었지만 대부분이 서양 문헌이어서 십자군 진영은 상세히 다룬 반면, 이슬람 진영에 대해서는 소홀했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 김능우, 박용진 편역, 『기독교인이 본 십자군, 무슬림이 본 십자군』,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pp.5-6, 24.

십자군 전쟁에서 유럽이 패배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유럽이 결집하고 이슬람 세계가 분열되었던 전쟁 초기와 달리, 중후기는 정반대의 형세를 보이게 되었다. 이슬람 세계는 이마드 앗 딘 장기, 누르 앗 딘(누레딘), 살라흐 앗 딘(살라딘)과 같은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 결집된 반면에, 유럽 세계는 전쟁의 본래 명분을 망각하고 사분오열을 겪게 되었다. 도리어 이슬람 세계가 지하드(성전과 같은 의미)라는 명분으로 유럽 세계의 침략을 막아냄으로써, 그들이 십자군 전쟁 초기의 유럽 세계처럼 행동하였다. 이후 자신들의 땅에 세운 십자군의 거점을 하나하나 함락하여 일소시켰다. 십자군 전쟁의 최후에서 이슬람 세계가 웃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역사적 흐름에서는 유럽이 웃게 되었다. 수 세기에 걸쳐 유럽은 세계를 제패했다. 이 역사적 흐름이 십자군 전쟁에서 유럽을 부각시키고 이슬람을 그늘에 가리게 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역사교육에서도 십자군 전쟁의 '영향'을 핵심 교육 요소로 삼고 있다. 2015 개정 교육과정 기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는 총 4종(금성, 미래엔, 비상교육, 천재교육)이 있다. 각 교과서는 서술상의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핵심 교육 요소에 있어서만큼은 전 종의 교과서에 서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데, 그 원칙이 지켜진 부분이 십자군 전쟁의 영향이다. 반면, 이슬람 세계의 역사적 흐름을 서술하는 '서아시아, 인도 지역의 역사' 단원에서는 서아시아(이슬람) 왕조의 변천만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십자군 전쟁이 이슬람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거의 밝히지 않는다. 세계사는 역사의 보편적인 발전 법칙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분야이다. 그 관점에서 봤을 때, 십자군 전쟁을 통한 유럽의 발전은 '보여주고 싶은' 부분이지만, 십자군 전쟁을 통한 이슬람의 쇠퇴(~15세기 정도까지)는 '보여줄 수는 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겉으로는 아랍 세계가 눈부신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인다. 서유럽인들이 연이은 침공으로 이슬람이 뻗어 나가는 것을 억제할 생각이었다면 그 결과는 완전히 반대로 나타났다. 무슬림들은 프랑크 국가들의 2세기에 걸친 동방 식민 지배를 완전히 뿌리뽑는 데 그치지 않고, 오스만 투르크의 깃발 아래 서유럽을 정복하러 다시 나설 만큼 세력을 회복한 것이다. …(중략)… 이것은 말 그대로 겉모습일 뿐이다. 십자군 전쟁 동안 에스파냐에서 이라크에 이르는 아랍 세계는 아직은 지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가장 앞선 문명의 보고였다. 그러나 나중에 세계의 중심은 결정적으로 서쪽으로 옮겨진다.

십자군 전쟁이 서유럽에게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진정한 혁명을 일으키는 기회를 제공했다면 동방에게 이 성전은 오랜 쇠락과 암흑의 시기로 내몰리는 계기였다.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던 무슬림들은 몸을 도사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겁을 먹었고, 방어적이었으며, 너그럽지 못했고, 메말라 갔다. 다른 세계가 발전함에 따라 이 태도는 점점 심해졌고 그 결과 그들은 변방으로 밀려났음을 느끼게 되었다. 무슬림에게 발전이란 전혀 다른 세상 얘기였다. 근대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 아민 말루프, 위의 책, pp.361, 365-366.
[십자군 전쟁의 영향과 관련한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들의 서술]

(1)
십자군 전쟁으로 서유럽 사회는 크게 변화하였다. 교황권이 쇠퇴하였고 장기간 참전한 제후와 기사 계층이 몰락하여 봉건제가 흔들리고 왕권이 강화되었다. 한편 지중해를 통한 동방과의 교역과 문화 접촉이 활발해져 상공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성장하는 가운데, 비잔티움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서유럽 문화의 발전을 자극하였다.
11세기경부터 교통 요지에 시장이 생기고, 시장에 상인과 수공업자가 모여들면서 도시가 성장하였다. 십자군 전쟁 이후에 원거리 무역이 활발해지고 거래 규모가 커지자 도시는 더욱 발전하였다.

- 김형종 외, 『고등학교 세계사』, 금성, 2018, pp.124-125.

(2)
십자군 전쟁은 서유럽 사회에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교황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장기간 전쟁에 참여한 제후와 기사 계층이 몰락하여 봉건제가 흔들렸지만, 왕권은 강화되었다.한편 전쟁 과정에서 동방과의 교역이 활발해져 상공업이 발달하고 이탈리아 도시들이 번영하였다. 또 이슬람 및 비잔티움 세계와의 문화적 접촉을 통해 서유럽 문화가 자극을 받게 되었다.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인구 증가를 배경으로 11세기경부터 서유럽 각지에 시장이 열렸다. 시장을 중심으로 교역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로마 시대의 도시나 교회의 주변, 그리고 교통의 요지에 상인과 수공업자가 모이면서 도시가 형성되었다. 특히 십자군 전쟁의 영향으로 원거리 무역이 활발해지고 상업 거래가 확대되면서 도시는 한 층 성장하였다.

- 최준채 외, 『고등학교 세계사』, 미래엔, 2018, pp.116-117.

(3)
11세기경부터 서유럽에서 상업이 활기를 띠었다. 농업 생산성 증가로 잉여 생산물이 증가하자 이를 교환하는 시장이 서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교역 활동이 활발해졌고 교통로를 따라 도시가 발달하였다. 특히,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 무역이 활발해져 상공업 도시가 더욱 발달하였다.

- 이병인 외, 『고등학교 세계사』, 비상교육, 2018, p.121.

(4)
11세기 이후 서유럽의 사회 안정, 인구 증가와 그에 따른 경작지의 확대는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켰고, 농업 생산성 향상으로 발생한 잉여 농산물은 소규모 지역 시장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또, 국제적인 상업 즉 원거리 무역도 활성화되었다. 십자군 전쟁으로 지중해 무역은 더욱 활기를 띠었고, 이를 주도한 베네치아, 피사, 제노바 등의 항구 도시들이 번창하였다.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상인들은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을 서아시아로 운송하고 그곳에서 비단과 향신료 등 아시아의 물품을 싣고 돌아오는 식으로 이득을 취하였다.

- 김덕수 외, 『고등학교 세계사』, 천재교육, 2018, p.130.

이상의 설명에서 십자군 전쟁이라는 같은 주제를 다루더라도, 바라보는 대상, 관점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설명이 달라질 수 있음을 확인했을 것이다. 지난 장에서 사료비판의 방법 중 하나인 교차검증을 설명할 때, 양자 혹은 다자가 얽힌 사건을 해석할 때는 한쪽 입장의 기록, 기록 방식만 보지 말고 다른 쪽 입장의 기록과 기록 방식을 봐야 한다고 밝혔다. 교차검증의 필요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십자군 전쟁이다. 필자는 '이슬람 세계의 관점에서 십자군 전쟁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를 몇 가지 논거를 통해 설명하였다. 독자 여러분들이 십자군 전쟁을 바라보는 인식이 바뀌었을 것이라 믿는다. 지금부터는 십자군 전쟁 시기 기록된 유럽, 이슬람 사료를 비교 분석해보며 사료비판의 실제를 경험해보겠다.


I. 제1차 십자군 전쟁(1096~1099)

(1) 안티오크 함락에 대한 유럽, 이슬람 세계의 입장

십자군의 안티오크 점령(1097년, 위쪽 사진)과 안티오크 위치(아래쪽 사진)
<유럽 측 기록은 [E], 이슬람 측 기록은 [I]로 표시함.>

[E]
도시의 지배자였던 야기 시얀(안티오크 총독)은 프랑크인들을 두려워하던 사람이어서 동료들을 데리고 도망가 버렸다. …(중략)… 언덕에 살고 있던 시리아인과 아르메니아인들은 이 도망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았고, 이들을 즉시 붙잡아서 그들의 목을 베어 보에몽에게 가져왔다.

- 김능우, 박용진 편역, 위의 책, p.95.

[I]
“바기 시얀은 그 누구에게서도 본 적이 없던 용맹, 탁견, 결의, 경계심을 보여주었다. …(중략)… 바기 시얀은 두려움이 들어 성문을 열고 30명의 시종을 데리고 황급히 도주했다. …(중략)… 큰 슬픔에 휩싸이는 바람에 그는 졸도하면서 타고 있던 말에서 떨어졌다. 그는 살아날 가능성이 없었고 죽음이 임박했다.

- 위의 책, pp.100-102.

(2)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유럽, 이슬람 세계의 입장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1099년, 위쪽 사진)과 예루살렘 위치(아래쪽 사진)
[E]
(레몽 백작은) 그곳에서 하느님의 기적의 목소리를 듣고서 주군과 동료들에게 말했다. “만약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롭게 베풀어주신 이 성물을 우리가 얻지 못한 채 사라센인(무슬림)들이 이곳을 점령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들 사이의 증오심으로 이 성물을 더럽히고 파괴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우리에게 이 기회를 주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이 성스러운 장소를 정성을 다해 보호하지 못한다면, 하느님은 도시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지휘관들은 공포를 느껴서라기보다는 지쳐서 후퇴하려고 했다. 그때 먼지구름이 다가왔다. 레몽 필레투스가 부하들을 데리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게다가 그의 부하들이 너무도 많은 먼지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들의 수효가 매우 많아 보였다. 신의 가호로 우리 군대는 구출되었다.

우리 기사들은 솔로몬 신전까지 그들을 쫓아가 죽이고 베었다. 그곳에서의 학살은 너무도 끔찍한 것이어서, 적들의 피가 발목까지 차는 도랑을 기사들이 걸어다닐 정도였다. …(중략)… 우리 군대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구세주이신 예수의 성묘에 가서 경배를 하고 예배를 드렸다.

- 위의 책, pp.110, 114-115, 117-118.

[I]
프랑크인들은 알 아크사 사원에서 7만 명 이상을 죽였다. …(중략)… 숭고하고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에서 남자들이 살해되고, 여자와 아이들은 잡혀가고, 재물이 약탈되었다면서 무슬림들이 당한 일이 언급되었다.그 말을 전하는 이들은 너무 큰 슬픔에 휩싸이며 라마단 단식도 하지 못했다.

통치자들은 우리가 언급할 일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고, 그로 인해 프랑크인들이 이슬람 지역들을 차지할 수 있었다. 아부 알무답파르 알아비와르디는 이러한 의미를 담아 다음의 시를 옮겼다. “로마군(십자군)이 그들에게 모멸감을 안겨줄 때 당신들은 태평스레 안락하게 지내고 있구나(일부만 인용).”

- 위의 책, pp.120-122.

제1차 십자군 전쟁은 유럽이 승기를 잡은 전쟁이었다. 유럽의 결집에 대해 충분히 준비하지 않은 이슬람 세계는 당혹스러운 패배를 맛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유럽 측에서는 '승자의 입장'에서, 이슬람 측에서는 '패자의 입장'에서 제1차 십자군 전쟁을 기록하였다. 따라서 양자가 얽힌 사건에서, 양자가 입장 차이를 보이므로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십자군이 안티오크, 예루살렘을 함락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다만, 이 사실을 둘러싼 '비하인드 스토리'는 유럽, 이슬람 측에서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이 점에서 '양자의 기록 중 무엇이 진실이지?'라는 의문이 생기고, 사료비판이 필요해진다. 안티오크 함락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안티오크 총독이었던 야기 시얀(바기 시얀)이라는 인물이 유럽과 이슬람 측 기록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야기 시얀이라는 인물이 실재했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묘사, 최후를 맞이한 과정은 각 기록에서 차이를 보인다. 유럽 측의 기록에서는 그가 겁쟁이이고, 맥락상 도망가다가 붙잡혀 죽은 것으로, 이슬람 측의 기록에서는 그가 용맹한 인물이었고, 도주 중 말에서 떨어져 죽은 것으로 기록하였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적 사실은 '공인된, 지극히 제한적인' 사실임을 알아냈을 것이다.

기록에 투영된 관점도 고려해야 한다. 예루살렘 함락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유럽 측의 기록에서는 '하느님의 기적의 목소리', '신의 가호', '기쁨'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였다. 성전이라는 명분을 부여하기 위한 일종의 내러티브(서사)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기사들이 끔찍한 학살을 자행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하면서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예배를 드렸다는 점'에서 종교적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살상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도 엿볼 수 있다. 반면, 이슬람 측의 기록에서는 '너무 큰 슬픔'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였다. 이들에게는 전쟁이 비극이었던 셈이다. 또 주목할 만한 건, '태평스레' 있었다는 통치자들의 잘못이 언급되어 있다. 십자군의 침략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비극이 빚어졌으니, 그 원인을 통치자들에게서 찾는 것으로 해석된다. 확실히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유럽과 이슬람의 입장이 다르다. 역사 자체에는 '관점'이 없다. 그저 눈 앞에서 벌어진 '사실'일 뿐이다. 그 사실을 어떤 사람이,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역사 기록의 중요한 특성을 알아냈다. 양자가 얽힌 역사적 사건을 기록할 때는 양자 모두가 공통되게 기록하는 내용도 있지만, 상이하게 기록하는 내용도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상이한 기록이 발생하는 주요 원인은 양자의 관점 차이이다. 따라서 이런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해석을 내놓으려면, 양자의 기록을 모두 살펴본 뒤에 모순점을 추려서 무엇이 진실인지를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 그것이 곧 사료비판이다. 이어서 제2차, 3차 십자군 전쟁과 관련한 사료도 살펴보자.


II. 제2, 3차 십자군 전쟁(1147~1149, 1189~1192)

(1) 에데사 함락에 대한 유럽, 이슬람 세계의 입장

이마드 앗 딘 장기 군대가 에데사를 함락하는 과정(1144년, 위쪽 사진)과 이마드 앗 딘 장기의 모습(아래쪽 사진)
a. 십자군 왕국 내의 내분에 관한 유럽, 이슬람 세계 측의 공통된 서술

[E]
조슬랭 백작과 안티오크 제후 사이의 반감은 내재되어 있지 않고 공개적인 적대감으로 드러나곤 했다. 이러한 이유로 상대방이 공격을 받거나 불행에 빠진다고 해도 개의치 않을 것이었다. 오히려 이들은 상대방의 재난을 잘된 일이라 여기고 상대방의 실수를 즐거워했다. 앞서 말한 위대한 제후 장기[p.142에서는 '포악한 장기'로 표기]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했다. 그는 동방 전역에서 수많은 기병을 모집했고, 심지어 에데사 근교의 도시에서도 군사를 모집하여 포위에 투입했다.
…(중략)…
안티오크 제후는 에데사의 적대감을 부추겼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해야 할 의무는 거의 이행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적인 적대감으로 공공의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에 거의 신경쓰지 않았으므로, 원조를 해주어야 할 때에 적절한 원조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 위의 책, pp.143-145.

[I]
이마드 알딘은 에데사의 영주인 조슬랭이 외부의 요청에 따라 대다수 병사와 수비대 및 전사들을 이끌고 에데사에서 나갔음을 알게 되었다. …(중략)… 이마드 알딘은 그 점을 확인하고 나서 에데사로 향했다.
- 위의 책, p.148.

b. 에데사 함락 과정에서 행해진 전술에 대한 유럽, 이슬람 세계 측의 공통된 서술

[E]
장기는 도시를 방어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매우 고무되었다. 그는 도시를 군대로 포위하고 병사들에게 각지의 주둔지를 할당해 주고 참호를 파게 했다. 투석기와 공성 장치들은 도시의 방어를 약화시켰다. 계속해서 퍼붓는 화살세례는 끊임없이 시민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중략)… 그는 공병대를 보내서 참호를 파기도 하고 땅 밑으로 굴을 파서 성벽의 기반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성벽 아래로 굴을 파고 기둥을 세워서 벽을 지지한 다음 거기에 불을 놓았다. 그리하여 성벽의 많은 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 위의 책, pp.144-145.

[I]
도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터널을 뚫을 지점을 잘 아는 쿠라산인들과 알레포인들이 동원되었다. 그들은 유리하거나 불리한 지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미리 파악해 놓은 몇 군데에 터널을 뚫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깊이 터널을 뚫으며 땅속으로 들어갔고, 그러다가 마침내 성탑(城塔)의 초석 하단부에 도달했다. 그들은 터널을 단단한 목재와 특수도구로 지지해 두었다. 터널 공사를 마치고 나자 이제 남은 일은 불을 놓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그 일을 위해 이마드 알딘 아타벡(이마드 앗 딘, 아타벡은 셀주크 튀르크 왕조부터 그 계승자 치하에서 사용된 실권을 갖춘 고관을 뜻하는 투르크어를 의미(위의 책, p.133 1번 각주 참조))에게 허락을 구했다. …(중략)… 터널 구조물에 불을 놓자 목재 지지대가 화염에 싸였고, 그 즉시 성벽이 무너졌다.

- 위의 책, p.149.

(2) 살라딘에 대한 유럽, 이슬람 세계의 평가

살라딘을 그려넣은 주화
[E]
수많은 기독교도를 박해한 자를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해 먼저 그 박해자의 출신에 관한 몇 가지 사항을 가능한 한 짧게 말하겠다. 그는 미르무라이니 종족 출신이며, 그의 조상들은 고귀한 출신도 낮은 신분의 평범한 출신도 확실히 아니었다.

살라딘은 다마스쿠스의 매춘여성들로부터 이득을 챙겨서 악명이 높았다. 그 여성들은 먼저 대가를 지불하고 욕정의 직업에 대한 그의 허락을 받아야만 매춘을 할 수 있었다.

- 위의 책, pp.190-191.

[I]
살라딘은 교리에 밝았고, 열성을 다해 지고하신 알라를 염송했다.찬양받으실 지고하신 알라께서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자들. 알라께서는 선행하는 자들을 사랑하신다.”라고 말씀하셨다. 살라딘은 인자했고 웬만한 일은 너그럽게 보아 넘겼으며, 화를 내는 데 더디었다.

- 위의 책, pp.176, 182-183.

(3) 하틴(힛띤) 전투에 대한 유럽, 이슬람 세계의 입장

하틴 전투(1187년)를 나타낸 그림
a. 예루살렘 국왕의 실책

[E]
군대는 매우 큰 규모였다. 기사가 1,200명이었으며, 보병은 1만 명 이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을 믿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보호자이자 구원자이신 하느님이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트리폴리 백작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와 국왕 모두 물, 음식, 다른 생필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는 안 되오. 만약 멀리 있게 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고독, 배고픔, 갈증, 타는 듯한 열기에 따른 죽음에 이르게 될 수도 있소(일부만 인용).” 그러나 “남의 말 잘 듣는 사람이 왕이 되어 신하들이 아침부터 잔치판을 벌이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라고 (예루살렘 왕이 답)했다.

그들은 1마일 정도 떨어진 갈릴리 호수로 가기 위해 좁고 험준한 지역을 통과했다. 이러한 이유로 백작은 왕에게 이렇게 전했다. “우리는 서둘러 이 지역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물에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는 물이 없는 곳에 막사를 쳐야 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국왕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즉시 통과할 것이다.” 그동안 투르크인들은 군대의 배후를 공격했고, 템플 기사단과 후미의 군대는 거의 저항할 수 없었다. 갑자기 국왕은 막사를 설치하라고 했다. 그것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 위의 책, pp.212-215.

b.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이 패배한 원인에 대한 유럽, 이슬람 세계 측의 공통된 서술

[E]
무슬림 군대인 에사우의 아들들은 하느님의 백성(십자군)을 에워쌌고 주변의 건조한 덤불에 불을 놓았다. 밤새 쏟아지는 불꽃의 열기와 화염은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의 고통을 배가시켰다.

국왕, 주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성 십자가와 순교자들의 유산과 하느님의 군대, 그리고 자기 자신들을 보호하러 되돌아오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군대는 “우리는 갈증으로 죽을 지경이어서 더 이상 싸울 수 없으므로 돌아갈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한 번 명령이 떨어졌지만, 그들 역시 다시 한 번 거부했다.

- 위의 책, pp.216-217.

[I]
일부 무슬림 자원병들은 그곳 땅에 불을 놓았는데 풀이 많아 활활 타올랐다. 바람은 프랑크인들 쪽으로 불어 화염의 열기와 연기가 그들에게로 갔다. 갈증과 계절의 더위, 화염의 열기와 연기, 전투의 격렬한 기운이 프랑크인들에게로 몰려왔다. 백작이 도망치자 그의 군대는 사기를 잃고 항복할 지경에 이르렀다.

적의 막사가 쓰러진 이유는 이렇다. 프랑크인들은 공격을 하면서 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들은 몇 차례 공격하는 중에 자신들의 갈증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그때 무슬림들이 프랑크인들이 있는 곳으로 올라와 왕의 막사를 넘어뜨렸다. 무슬림들은 프랑크인들을 모조리 사로잡았다.

- 위의 책, pp.207-208.

(4) 르노 드 샤티용(이슬람 측에서는 아르나뜨, 알브린스로 표기)의 최후에 대한 서술상 차이

르노 드 샤티용(1125~1187), 제2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안티오키아 공국을 다스렸다. 그러나 여러 악행으로 이슬람 세계의 원한을 샀고, 살라딘에 의해 처형당했다.
[E]
다음날 르노 드 몽레알(르노 드 샤티용) 공작이 처형되었다.

- 위의 책, p.218.

[I]
술탄은 왕에게 찬물을 내주었고, 다시 왕은 알카락의 영주인 알브린스에게 호의를 베풀어 그도 물을 마시게 해주었다. 그러자 살라딘이 말했다.

“이 저주받을 자는 내 허락도 없이 물을 마셨으므로 나에게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술탄은 알브린스에게 말하면서 책망했고 그의 협정 위반 사실을 열거했다. 술탄은 직접 그에게 다가가서 칼로 그의 목을 쳤다. 술탄은 말했다.

“나는 그를 잡게 되면 죽이겠다고 두 번 서약한 바가 있다. 한 번은 그가 메카와 메디나로 행군하려 했을 때이고, 다른 한 번은 그가 협정을 어기고 대상(隊商, 상인 무리)을 공격했을 때였다.”

- 위의 책, pp.209-210.




(5)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최후에 대한 서술상 차이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1127~1190),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제3차 십자군을 전쟁을 위한 원정을 떠나던 중 강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E]
황제가 다른 분야에서는 현명했으나 어리석게도 물살에 거슬러 자신의 체력을 시험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말리려 했으나 황제는 물에 들어갔고 소용돌이에 휘말려 빠졌다. 종종 커다란 위험을 빠져나왔던 황제였으나 비참하게도 죽고 말았다. 비록 그를 갑자기 거두어 가셨지만, 구원받을 것이다. 우리는 틀림없이 그렇게 믿는다.

- 위의 책, p.243.

[I]
독일 왕이 몸을 씻으러 강물에 들어갔다가, 물 깊이가 허리 높이 정도 되는 지점에서 익사하고 말았다. 알라께서 그자의 사악함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셨다.

- 위의 책, pp.238-239.




제2차, 3차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세계의 반격이 두드러진 전쟁이었다. 반대로, 제1차 십자군 전쟁 때 보여주었던 유럽의 결집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1)-a.에서 볼 수 있듯이 십자군 왕국 간의 내분이 일어나기도 했고, (3)-a.에서 볼 수 있듯이 국왕이 실책을 저질러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하틴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안기기도 하였다. 한편 이슬람 세계는 탁월한 장군이 나타나면서 결집되었다. (1)에서 등장하는 이마드 앗 딘 장기는 십자군 왕국에서 내분이 발생한 상황을 이용하여 에데사를 함락시켰고, (2)에서 등장하는 살라딘은 하틴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십자군에게 큰 타격을 안겨주었으며, 약 한 세기 전에 빼앗겼던 예루살렘을 탈환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제2차, 3차 십자군 전쟁 역시 '승자'와 '패자'의 구도가 명확히 나뉘었고, 이에 따른 관점의 차이가 역사 기록에서도 서술상의 차이를 보이게 만들었다.

전투 과정에 관한 서술에서는 양측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1)-a.에서 십자군 왕국 간의 내분이 일어났다는 서술, (1)-b.에서 성채를 함락시키기 위해 성 밑으로 터널을 뚫은 뒤 불을 피우는 전술을 사용했다는 서술, (3)-b.에서 무슬림 군대가 덤불에 불을 피워 갈증에 시달리던 십자군을 더 괴롭게 했다는 서술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양측이 '서로 거짓말을 하자.'라고 합의를 한 것이 아니라면, 어떤 사실을 공통되게 기록한 것은 신뢰성을 높여준다. 앞에서 비유했듯이, 역사는 눈 앞에서 벌어진 사실이므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두 입장이 역사 기록에 관한 의견 일치를 보인다면, 이것은 각 입장이 자신의 관점을 일방적으로 투영한 게 아니라 '본 대로 기록하자.'라는 의지가 반영되었다는 증거로 해석될 수 있다. 필자가 조심스럽게 추측하자면, 전투 과정에 관해 기록할 때는 인물 평가처럼 주관적 의견, 관점이 노골적으로 개입되기 어려운 특성이 있기 때문에, 서술상의 일치를 보이는 '객관성, 신뢰성'이 담보된 듯하다.

인물에 관한 서술에서는 극명한 차이점을 보인다.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단순하다. '나'를 중심에 두고 인간관계를 떠올려보자. 그러면 몇 가지의 분류가 가능할 것이다. 생활을 같이 하는 가족 구성원, 친밀하게 교류하는 친구, 적당하게 교류하는 친구, 이름만 아는 친구 혹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나를 좋아하는 사람, 나를 싫어하는 사람 이런 식으로. 이제 각 항목으로 분류한 인간관계가 '나'를 대하는 관점을 생각해보자. 나한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그 소식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이 제각각 다를 것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축하해줄 것이고, 나를 적당히만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가보다.'라고 넘길 것이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뭘하든 간에 다 부정적인 반응으로 일관할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인간관계의 특성이다. 그것을 그대로 역사에 적용해보자. (2), (4), (5)에서 나타나는 서술상의 차이를 어렴풋이 이해할 것이다. 살라딘은 이슬람 세계에서는 '영웅'이었지만, 유럽 세계에서는 '난공불락의 적'이었고, 르노 드 샤티용은 이슬람 세계에서 '공공의 적'이었으며,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는 유럽 세계에서는 '아깝게 가버린 인물'이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안 죽었으면 호되게 우리에게 곤욕을 줬을 인물'이다.

결국 역사 기록은 바라보기 마련이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역사 해석 또한 달라진다. 역사를 가장 정확히 판단하는 방법은 '역사라고 불리는 일이 생겨날 당시에 두 눈으로 생생히 목격'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역사는 흘러간 과거이므로, 그렇게 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기록을 남기는 것인데, 기록도 결국은 '사후적 행위'이자 '불완전한' 인간이 행하는 것이므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기록이 만들어지는 건 대단히 어렵다. 더욱이 기록자의 주관적 의견이 개입되면, 그 의견이 만든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역사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 당시를 생생히 볼 수 없는' 역사를 해석하는 사람에게는 다양한 관점의 증언을 필요로 한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끼워맞추다 보면, 어딘가에서는 접점이 만들어지고, 또 다른 어딘가에서는 간극이 만들어진다. 다양한 관점을 종합하면서 역사를 바라보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 마련된다. 사료비판은 그 과정으로 향하기 위한 도구이다. 십자군 전쟁에 관한 여러 사료를 살펴보면서 감을 깨달았기를 바란다.


2. 사실로 덮어진 '미제': 심일 소령을 둘러싼 역사적 쟁점

심일 소령이 파괴한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군 자주포(왼쪽 사진)와 심일 소령(1923-1951, 오른쪽 사진)

어떤 역사적 사실을 밝힐 수 있는 자료가 없거나, 있더라도 자료의 신빙성이 의심되면 어떠할까? 참으로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역사에는 이러한 미스터리가 많이 산재해 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를 여기서 짚어보고자 한다. 심일 소령은 한국전쟁(6.25 전쟁) 발발 당시 춘천 전투에서 북한군의 침입을 격퇴하는 혁혁한 공적을 세운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호국영웅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심일 소령이 공적을 세운 게 아니라 오히려 도망갔다는 이대용 장군 등의 증언, 논란을 확실히 종식시킬 수 없는 사료의 부재로 논란이 불거졌다. 이 논란은 '심일 소령이 공적을 세운 건 사실이다.'라는 최종 입장을 내면서 일단락되었지만, 여전히 의심스러운 구석들이 많다. 여기에서는 관련 인터넷 뉴스 기사의 주장과 『역사 문해력 수업』의 주장을 비교 분석하는 방식으로 내용을 간략히 개관해보겠다.


쟁점 1: 관련자의 증언은 '신뢰할 만한 사료'로 활용할 수 있는가?

허남성 교수는 “역사학에서 하드 소스(경성자료) 문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면서 “소프트 소스(연성자료)인 오럴히스토리와 구술은 신빙도를 16~17%로 본다”고 했다. 허 교수는 “《육사30년사》를 집필하며 창군인사 200여 명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구술자료의 신뢰도는 10% 미만이었다”며 “이마저도 외국 참전 용사의 2분의 1의 신뢰도를 보였다”고 했다. 이대용 장군도 심일 소령의 옥산포 전투 시기, 적 자주포 파괴주체와 파괴대수 등의 증언을 할 때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 오동룡, <6·25 호국영웅의 ‘불편한 진실’은 없다!>, 조선일보, 2017.

VS

위원회의 한 위원은 “역사학은 하드 소스(경성자료) 문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위원회의 입장은 증언에 대한 공문서의 절대적 우위로 요약된다. 기억에 대한 기록의 우위 인정이 학계의 통례인 것은 맞다. 하지만 기억보다 기록을 중시하는 일반 원칙이 적용되기 어려운 경우가 허다하다. 부실하거나 왜곡된 공문서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증언에 대한 기록의 우위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이다.

- 최호근, 『역사 문해력 수업』, 푸른역사, 2023, p.110.

사실 무언가를 기록하는 행위도 그냥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기록을 위한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된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심일의 공적을 둘러싼 논쟁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은 '기록을 위한 환경'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발발하면, 전시 태세를 갖추고 신속하게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적하게 뭘 기록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록으로 남기기 어려운 역사는 역사로 인정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문자로 쓴 기록이 사료를 대표할 뿐이지, 다른 형태의 자료도 사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문서가 모두 옳은 기록도 아니다. 위조될 여지가 충분하다. 책의 저자는 이대용 장군 증언의 신빙성이 낮지 않다는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이대용은 한국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장교일 뿐만 아니라, 베트남전쟁 때 주월 공사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교민 철수를 지휘했다. 북베트남의 포로가 된 후에는 북한의 집요한 전향 설득을 거부하고 온갖 고초를 겪다가 끝내 고국에 돌아온 애국의 화신이기도 했다. 그가 보유한 군사적 전문성과 강직한 성품은 역사가들이 사료비판에서 가장 중시하는 요소들이다. 게다가 그의 증언은 직접 목격에 기초했다. 이런 이유에서 그의 증언이 갖는 무게감은 매우 컸다.

- 최호근, 위의 책, p.99.

역사에서 '공적 기록'은 양날의 검이다. 공적 기록이라는 명분으로, 공적 기록이 의도적으로 은폐했을 수 있는 사실을 담은 사적 기록, 개개인의 기록을 묻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은 문서를 중시하고 이외 형태의 사료의 신빙성을 낮다고 단정하는 태도는 공적 기록을 과도하게 신뢰하여, '진짜 역사'를 묻어버리게 하는 행위로 작용할 수도 있다. 책에서도 그 문제를 꼬집고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공문서가 왜곡해온 진실을 사적 개인들의 증언이 폭로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억에 대한 기록의 우위는 절대적일 수 없고, 공문서에 찍힌 직인이 진실을 보증하지도 못한다.

기록이 제때 작성되지 않았을 때, 최초의 기록이 실종되었을 때, 사후 기록이 부실하게 작성되었을 때, 기록에서 지나친 편향성이 발견될 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 난감한 상황에서 해결의 단서를 제공해주는 것이 관련자들의 기억이다. 기억의 가치는 이미 수많은 사례를 통해 입증되었다. …(중략)… 역사가는 당연히 증언에서 나타나는 착오와 혼란에 유념하고, 기억의 변형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기억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이유로 삼는 것은 매우 폭력적이다.

- 위의 책, pp.110-111.

따라서 증언도 엄연한 사료로 간주해야 한다. 비록 증언이 기록에 비해서 부정확성이 높을 소지가 있지만, 증언이 '만들어지는 계기'는 '두 눈으로 당시에 벌어진 일을 목격하고 기억'한다는 것에 있다. 쉽게 말해 증언은 오류와 망각을 불러일으키는 기억의 영역에 점차 물들고 있는 구전 형태의 사료인 셈이다. 일종의 정제 과정을 거치면 증언도 사료의 한 형태로 기능할 수 있다. 법정 재판에서도 증언을 참고 자료로 채택하듯이 말이다. 문서 형태의 사료가 아니라고 해서, 입으로 전해지는 건 부정확하다는 관념이 있다고 해서 증언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하는 건 적절한 행위가 아니다.


쟁점 2: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발굴된 문서를 믿을 수 있는가?

심일의 공적이 기록된 은성무공훈장 추천서
<은성무공훈장 추천서에 기록된 심일의 공적>
한국군 제7연대 소속 심일 중위는 1950년 6월 26일 춘천전투에서 탁월한 영웅적 행동을 보여주었다. 소양강 남안의 방어진지에 자신의 중대와 함께 있던 심 중위는 소양강 도하를 시도하던 적과 포격전을 전개했다.
…(중략)…
치열한 사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뛰어난 침착성을 발휘한 심일 중위는 전차가 진지 15야드 이내에 근접할 때까지 사격을 멈추고 있다가 지근거리에서 사격을 개시했다. 심 중위의 행동에 고무된 대전차포 대원 일부가 급하게 진지로 복귀하여 이를 지원했다. 심 중위는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3대의 전차가 파괴될 때까지 진지에 끝까지 남아있었다.



- 위의 책, p.105.
공적확인위원회가 발굴한 미 은성무공훈장 추천서, 태극무공훈장 공적서, 북한군 262부대 훈장(훈패) 상신서, 미 제1해병사단 사진자료 등은 쟁점사안을 파악하는 핵심 자료였다.

김광수 교수는 1980년대부터 공개를 시작한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미 포로신문 보고서와 심일 소령의 미 은성무공훈장을 상신하는 공적조서를 발굴할 수 있었다. 당시 공적조서를 작성한 이는 전투 현장에 있었던 6사단 고문단장 토머스 맥페일(Thomas McPhail) 중령이었다.

김광수 교수는 “미국 정부가 심일 소령에게 은성무공훈장(실버스타)을 수여한 사실은 알았지만 자료는 이번에 처음으로 발굴했다”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대용 장군은 심일 소령이 실버스타를 수훈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심일 중위는 6월 26일의 ‘소양교 전투’로 미 은성무공훈장과 태극무공훈장을 수훈한다. 1950년 9월 1일 미국 정부가 결정한 은성훈장 추천서는 ‘국군 제7연대 소속 심일 중위가 1950년 6월 26일 10시경 춘천 전투에서 소양강 도하를 시도하는 적 전차 3대를 파괴할 때까지 진지에 남아 포격전을 전개한 영웅적 행위를 기려 훈장을 추천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 위의 기사.

VS

<은성무공훈장 추천서>는 새로운 논란을 초래했다. 신뢰할 수 있는 1차 사료로 인정받기 위해서 반드시 충족해야 하는 형식과 내용 조건에서 하자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문서 작성 시점이었다. 사건은 6월 26일에 일어났으나, 추천서는 9월 1일에야 작성되었다. 이 시간 간격에 따른 의문이 해소되려면, 추천서 작용에 활용되었을 토대자료가 필요하다. 그런데 추천서에는 어떤 자료도 첨부되어 있지 않았다. 또 하나의 형식상 결함은 추천서 작성자의 서명 부분에서 발견된다. 문서 작성자인 맥페일 중령의 서명이 본래 있어야 할 위치가 아닌 곳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맥페일 중령은 심일의 공적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으며, 목격자의 진술이나 증언도 없다고 기록했다.

이보다 더 중대한 문제점은 내용에서 발견된다. <은성무공훈장 추천서>에 기술된 공적의 일시와 내용이 그동안 군이 주장해온 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군은 심일 중위가 6월 25일 오후 2시 춘천 북방 옥산포 인근에서 북한군 자주포를 파괴했다고 강조했다. 그에 반해 <은성무공훈장 추천서>는 심일 중위가 옥산포 남쪽 4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소양교에서 6월 26일 오전 10시에 북한군의 자주포 3대를 파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불일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위의 책, pp.105-106.

증명은 정직의 요건이다. 예컨대, '나는 어떤 분야의 전문가다.'라고 어필하려면,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학력, 경력, 수상 등이 있어야 하듯이 말이다. 역사에서도 신뢰성을 얻기 위한 증명 절차를 필요로 한다. 증명 절차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료이다. 그런데 증명 절차를 거쳐 믿을 수 있는 역사가 있는 반면, 증명 절차를 거칠 매개체가 없어 섣불리 믿을 수 없는 역사도 있기 마련이다. 심일의 공적을 둘러싼 논쟁이 일어난 이유는 정직의 요건을 확실히 밝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당 논쟁을 일단락시킨 근거 중 하나가 은성무공훈장 추천서였다. 심일의 공적이 적혀있고 맥페일 중령의 서명이 들어간 문서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책에서는 은성무공훈장 추천서가 심일이 공적을 세운 '당시'에 쓰인 게 아니고, 두 달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쓰였다는 점, 내용 작성의 토대가 된 참고 자료가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 서명의 위치가 다른 점, 심일이 북한군을 격파한 일시, 장소가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들어 문서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 의문들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은성무공훈장 추천서는 심일이 공적을 세웠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문서 자체가 '위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늘에서 툭 떨어진 사료는 없는 법이다. 은성무공훈장 추천서는 마치 하늘에서 툭 떨어진 사료가 아닐까 싶다. 미군 중령의 서명이 있고, 심일의 공적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기록한 문서라면 진작에 알려져서 논란의 여지를 없게 해야지, 반세기가 흘러서야 '이런 자료가 나타났으니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라고 하면 도리어 논란을 키우게 된다. 물론 사료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발견될 수도 있고, 기존에 공고하게 믿어왔던 인식, 학설이 한순간에 깨지는 경우도 있다. 단, '충분한 비판, 근거'가 뒷받침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신뢰할 수 있는 기초자료를 충분히 확보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술된 결과가 다양한 비판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실체적 진실'의 복원이나 '총체적 진실'의 규명은 듣기 좋은 허언이나 허사에 불과하다.

- 위의 책, p.103.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은 '정답이 없다'라는 환기구를 열어두어야 한다. 교과서에 가르치는 역사적 사실마저도 학계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의견들이 제기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역사는 확실한 단정을 내리기 어려운 분야이다. '심일이 공적을 세운 게 사실인가?'에는 아직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려운 상태이다. 하지만 현재는 국가적으로 '사실이다'라고 못박은 상태이다. 논쟁을 사전에 차단해버리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정답이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의문을 던져야 하고, 깨지지 않을 것 같았던 정답을 깨뜨릴 줄 아는 게 역사의 본질인데도 말이다. 이 사례에서는 사료비판의 필요성과 함께 역사가의 자세를 배워가는 대목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학자의 추측은 어떤 종류의 반박에 대해서도 열려 있어야 하고, 모든 종류의 반박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앙상한 서사에 관인까지 찍히면, 그 역사는 어느덧 수정하기 어려운 공식 역사가 되고 만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아는 상당수의 역사가 그렇다.

- 위의 책, pp.116, 120.

본론 2절에 활용된 인터넷 뉴스 기사의 링크이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참고 바란다.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703100052


3. 나가며

지금까지 두 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사료비판의 실제를 알아보았다. 본론 1절에서는 십자군 전쟁에 관한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기록을 비교 분석하며, 양자 혹은 다자가 관계된 '하나의 사건'을 기록할 때 서술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는 사료비판의 방법 중 교차검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절에서는 심일의 공적을 둘러싼 쟁점을 살펴보며, 기록을 하기 어려웠던(혹은 할 수 없었던) 역사적 사건에서는 다른 형태로 된 사료를 채택하는 것을 고려하고, 설사 기록이 발굴되었더라도 맹신하면 안 된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이번 장은 이 시리즈의 다른 장에 비해 유독 호흡이 길었는데, 호흡의 길이를 늘려서라도 사료비판의 실제 모습을 충실히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 실제 모습을 이해하면, 사료비판을 역사교육에 적용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사료비판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행할 수 있다. 사료비판을 교육에 녹여내기 전에, 독서를 교육에 녹여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이 내용에 관해서는 이미 상세히 논한 바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겠다. 사료비판과 역사교육의 관계를 다루기 전에 독서와 교육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다룬 것도 그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이 장을 끝으로 <교육으로 가는 역사학 내비게이션> 시리즈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총 10장의 글을 통해 역사학이 교육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관계성을 짚어보았다. 역사학과 유튜브 콘텐츠의 관계(2-3장), 역사학과 인공지능의 관계(4-5장), 역사학과 독서의 관계(7-8장), 역사학의 사료비판과 역사교육의 관계(9-10장)가 그것이다. 필자는 역사학이 학문의 영역에만 머무를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학은 실생활 그리고 교육에서도 쓰임새가 분명히 있는 학문이다. 그 당위성을 밝힌 게 이 시리즈이다. 이에 수긍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역사학이 어느 길로, 어느 분야로 뻗어나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면, 이 시리즈의 소임을 다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에필로그에서 이와 관련한 짤막한 이야기를 더 풀어보겠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린다.


이전에 쓴 독서와 (역사)교육의 관계를 다룬 글들이다. 이 글들을 같이 읽어보면서 사료비판을 역사교육에 녹여내는 방법의 현실성을 높이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https://brunch.co.kr/@charlemagnekim/23

https://brunch.co.kr/@charlemagnekim/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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