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는 어디서든 생긴다

제3지대 역사교육 Note: 다시, 전환기 #3

by 샤를마뉴

2024년 3월,

주독야경(晝讀夜耕)의 삶이 시작되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일했다.

1학기가 종강하는 6월까지 그랬다.


몹시 바빴다.

쉴 틈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보람찼다.

'전성기가 이런 거구나'를 알았다.


이때부터는 학교, 학과에 대한 마음이 뜬 상태였다.

학교에서는 소위 '아싸(아웃사이더)'로 있다가,

학원에서는 날라다녔다.


그런데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던

필자 대학 사학과 내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그 한 줄기 빛은

교육자의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운명 공동체'의 출현이었다.

필자가 집필에 참여한 수능 역사 교재로

공부한 수험생이 '같은 사학과 직속 후배'로 들어온 것이다.

필자에게 일종의 제자가 생긴 셈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이 기적이, 필자의 얼마 남지 않은

집필진 생활에 준 영향은 무엇일까?

이 장에서는 그것을 얘기해보겠다.


2023년 하반기(9~12월), 즉 2학기에는

대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휴학을 했다는 뜻이다.


휴학을 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몸과 마음이 지쳤다.

집필진의 무거운 책임감을 신입 때 소화하기 힘들었고,

그와중에 학업까지 병행해야 했다.


'사망년'이라는 은어가 있다.

대학 3학년이 죽을 만큼 힘들어서

그것을 언어유희로 표현한 게 사망년이다.


3학년 1학기는 하필이면 들어야 할 교과목도 빡셌다.

문과생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데이터분석을

교양필수로, 전공필수로 시켜대니 죽을 맛이었다.

필자가 좋아하는 서양사 전공 과목을

넣어두지 않았다면, 도중에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집필진 일은 일대로 해야 했으니,

감당해내기가 어려웠다.

5~6월은 마음에 무거운 바위를 이고 사는 기분이었다.

지칠 대로 지쳐서, 쉼이 필요했다.


둘째, 집필진 업무에 집중하고자 했다.

대학 학년은 계속 올라가고, 졸업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인생 로드맵이 그려지지 않았다.

인문학도는 생계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대학 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생계를 보장받지 않는다.


사학 전공생이 전공을 살리는 길은

사실상 대학원 진학 말고는 없다.

그런데 필자 스스로를 객관화해봤을 때,

석사 과정은 어찌저찌 밟더라도,

박사 과정은 밟을 자신이 없었다.


인문학계는 어느 학교 출신인지를 매우 따진다.

필자는 1류 대학이라 불리는 명문대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필자 대학 사학과 커리큘럼의 수준도 그리 높지 않기에

학계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나아가서 잘할지에 대해 회의가 든다.


필자는 2023년부터 매달 전공 서적을 2~3권씩 읽고 있다.

그렇게 독서를 하게 된 배경에는

필자 대학 사학과 커리큘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학문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게 중요하다.


학자는 돈 앞에서 초연해야 한다.

물질적 이익보다는 앞으로의 학계에 줄 영향을 보고

학문에 매진하는 게 진정한 학자의 자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필자는

사학을 좋아하긴 하지만, 진정한 학자가 될 사람은 아니다.

필자는 경제적 여유를 획득하는 것을

중요한 가치관으로 삼는 사람이다.

'유복한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산 사람인지라,

경제적 여유를 더 갈구하게 되었다.


필자에게 집필진 업무는

전공을 살리면서, 경제적 여유의 활로를 열어놓는 길이었다.

관심 분야인 역사교육을 알아가는 길이기도 했다.

대학에서 어영부영 세월을 보내는 것보다

사회에 일찌감치 뛰어드는 게 더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때부터 대학은 '형식'에 불과하게 되었다.


휴학을 하면 대학 내에서 잊혀진다.

휴학한 뒤에도 친구를 만나러 대학에 놀러오면 모를까,

필자는 대학에서 의미 있는 인연을 많이 두지 못했기 때문에

휴학하고 대학에 갈 일이 없었다.


한 학기를 쉬고 2024년 1학기에 복학한

필자는 그야말로 고립된 상태였다.

같은 학번 친구들은 군대에 가거나 복수전공의 길로 빠지고,

몇몇 아는 후배 역시 군대에 가서 없었다.

처량했다.


학과 사람들하고 몇 마디 말은 터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개강총회에 참석했다.

그때가 2024년 3월 6일이었다.

개강총회는 새내기 얼굴을 보는 자리이기도 하고,

교수와 학생이 격의 없이 술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사제동행이기도 하다.

복수전공으로 흩어진 같은 학번 친구들도

이때는 고향에 돌아온 물고기처럼 몰려온다.


그렇지만 개강총회에 갓 참석할 때까지는

그저 사람 사는 정취를 느껴보자고 참석한 거지,

뭘 특별히 바라는 건 없었다.

개강총회 이후, 종강하기 전까지는

다시 유목민족처럼 각자의 삶을 살아가니깐.

늘 그래와서 별 생각도 없다.


개강총회의 묘미는 술자리이다.

강의실에서 교수와 학생 간의 상견례가 끝나면,

학교 근처 술집으로 가

술과 안주를 먹으며 즐거운 분위기에 젖는다.

교수님들도 학생들 사이에 끼며 그 시간을 함께한다.


사람이 워낙 많기 때문에

사람이 들어오는 순서대로 술집에 배석했다.

당시 필자는 7인석에 앉았는데,

필자를 제외한 5인 모두가 일면식도 없는 후배였다.

(나머지 1인은 교수님이다.)

대부분 새내기였다.


그래도 남이 아니라 같은 학과 후배 아니겠는가?

또 이렇게 시간을 내서 볼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모르는 사람들을 직접 보고, 대화하면서

알아가면 그렇게 내 사람이 만들어지는 법이다.


기묘한 인연이 다가왔다.

필자 바로 옆에 앉았던 새내기가 인사를 건넸다.

인사가 곧 사람을 대하는 시작이자 형식이니 받아줬다.

그 뒤에 그는 재수를 했다고 밝혔다.


영업 감각(?)이 생겼다.

재수, 즉 수능을 2번 쳐서 대학에 왔다는 뜻이다.

재수는 정말로 힘겨운 싸움이다.

수능 한 번에 모든 것이 결정나니, 수능을 위해 달려야 한다.

보통 재수생은 재종학원(재수 성공을 위해 생활 전반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학원)을 다녀

수험 공부에 파묻히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필자가 속했던 학원도 재종학원으로 성장했다.

학원 본원 아래에 있는 학원 분원,

즉 제3지대 교육에서는 재종학원에 공급할

교재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재수를 한 그도, 재종학원을 다녔을 확률이 높다.

재종학원을 다녔느냐고 물으니, 맞댄다.

상황이 더 재밌어졌다.

사학과에 왔으니,

당연히 수능에서도 역사 교과목을 응시했을 것이고

재종학원에서 그와 관련한 공부를 했을 테니

자연스럽게 '필자가 속했던 교재 개발팀을 알지 않을까?'라는

기대로 연결되었다.


일단 필자가 속했던 교재 개발팀을 아는지를 물어봤다.

안댄다. 게다가 거기서 만든 교재로 공부했댄다.

그 순간 필자의 눈빛 그리고 마음으로 웃었다.

가방에서 교재를 꺼내 저자 명단을 슬쩍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그가 놀랐다.

정말 저자 명단에 속한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 학과 선배라는 사실에 놀랐을 것이다.


필자도 덩달아 기뻤다.

바로 앞에 있는 학과 후배가

필자가 집필진 일을 하는 이유, 신념을 증명해주는

살아 있는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둘의 공감대가 급속히 높아지면서

수험생활, 수능 역사와 관련한 회포를 풀었다.

동향인을 만난 기분이었다.

마음의 결이 너무도 잘 맞았다.


그는 수능 역사를 공부하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그 팀에서 만들어준 교재의 퀄리티에 놀랐고,

고난도 N제가 특히 기억에 남았다고 했다.

극악스러운 난도인데, 퀄리티에서 아무 말을 할 수 없다는 점이

기억에 남은 이유라고 밝혔다.


그 팀이 존재했기 때문에

수능 역사를 공부할 때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줬고,

좋은 결과를 쟁취한 것이 회포의 핵심이었다.


고난도 N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래 링크의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

https://brunch.co.kr/@charlemagnekim/35


개강총회 때 그 기묘한 인연을 만난 후,

필자는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그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수험생 때 필자의 모습을 생각해봤고,

그때와 달리 그는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흐뭇하기도 했으며,

그간 집필진 업무에 임했던 필자의 자세를 반성했다.


필자는 지금도

고등학생 시절을 넘을, 심적으로 힘든 시기는

없다고 생각한다.

'고등학생 시절의 부족함', '고등학생 시절의 한'을 품고

대학생으로 나아갔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한다는 건

필연적으로 외로워지는 길이다.

고등학생 때도 그랬고, 대학에 온 뒤에도 그랬다.

역사와 같은 인문학을 좋아하는데, 천재적이지 않고

우리나라의 역사보다는 이국의 역사에 관심이 많다면,

고립을 자처하는 길이겠다.


이국의 역사, 즉 세계사는

배울 때의 진입장벽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그만큼 얻어갈 지식도 많고,

끝없는 흥미의 샘물에 몸을 적실 수 있다.

세계사를 처음 배울 때는 모든 게 생경했지만,

배울 수록 끌리는 분야였다.


그러나 세계사 학습의 진입장벽이 높기 때문에,

진입 자체를 안 하려는 거부감이 상당한 것 또한 사실이다.

다들 안 하려고 하기 때문에,

세계사를 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길은 척박하다.

중고등학교 교육, 대학 교육, 사회 모두에서 그렇다.


따라서 세계사 학습의 진입장벽을 낮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의 일환이 교육이다.

단순히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라,

'체계적인 학습 방법론'을 가진 교육이어야 한다.


학교에서도, 인터넷 강의에서도 세계사 교과목을 다 가르치고 있다.

그 가르침이 완벽했다면 '소외 현상'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들이 가르쳐주는데도 하지 않는다는 건,

다른 점에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12년의 유년 인생이,

앞으로의 성년에 큰 영향을 주는 순간은 대입일 것이다.

'어느 대학을 갔느냐?'가 여전히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입은 곧 끝없는 시험의 연속이다.

공부하기 쉽지 않은 교과목을 시험 성적을 내기 위한

카드로 사용하는 건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교육평가를 위해서는

교사 혹은 강사가 '가르치는' 1차적 교육뿐만 아니라,

'가르친 내용'을 학생이 스스로 '앎'으로 바꾸는 2차적 교육도 필요하다.

2차적 교육의 수단이 문제집과 같은 교재이다.

제3지대 교육은 이 2차적 교육을 관장한다.


2차적 교육은 1차적 교육 못지 않게 전문성이 필요하고,

교재를 시중에 '판매'하는 경우라면, 손익분기점도 계산해둬야 한다.

2차적 교육의 전문성이라 하면,

교재로 집필할 교과목의 이해도와 그것을 교육에 적용하는 능력이다.

전자의 전문성은 수많은 역사학자들의 존재로,

후자의 전문성은 수많은 교육자들의 존재로 입증된다.


그렇다면 역사교육에서의 2차적 교육을 위한 기반은 있는 셈이다.

문제는 '공급과 수요의 논리'이다.

학생들에게 교과목 선택의 자유를 주었는데,

'어렵지만 도전할 교과목'보다는 '쉽게 효율을 내는 교과목'을

선택하는 경향이 두드러진 탓에,

역사 교과목은 수요가 절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다.


공급자(생산자)가 애써 물품을 만들었는데,

소비자의 수요가 없으면 손해를 모조리 감수해야 한다.

역사교육에서의 교육 인프라가 열악한 건 이 때문이다.


역사학자는 학문 연구,

교사는 학생 지도, 수업, 교육행정 등의 '본업'을 갖고 있다.

교재를 펴내는 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부업'이다.

그런데 부업을 할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다면,

부업을 했는데 충분한 이득을 거두지 못한다면,

누군가에 도움을 주기 위해 해야 할 일임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역사교육의 교육 인프라를 개선하는 건 '이상적 목표'이지만,

수많은 현실적 문제로 인해 이상에만 머무는 실정이다.

이 관점에서 봤을 때, 제3지대 교육은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메우고자 나타난 결과물일 뿐이다.


대학생은 아직 본업(직장)이 없는 신분이며

대입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최신의 교육 현장'을 몸소 경험한 기억을 가진 존재이다.

이들에게 제3지대 교육은 굉장한 매력을 주는 요소이다.


그런데 교육에 대한 뜻을 품고 제3지대 교육에 들어왔더라도,

그 뜻을 초연히 지키기는 어렵다.

우선 대학에서 공부하는 본업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물밀듯이 들어오는 집필 업무를 병행하는 게 쉽지 않고,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 매너리즘이 오기 마련이다.


필자도 어려웠던 학창 시절이라는 배경을 갖고,

그 배경이 다른 누군가에게 반복되는 걸 막고자

제3지대 교육에 뛰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교육을 지도하는 자의 무거운 책임을

막상 떠안게 되니 뜻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솔직히 조금씩 흐릿해지긴 했다.


그 상황에서 그가 필자 눈앞에 나타난 것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매너리즘을 느꼈던 집필 업무가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원하던 것이었고,

필자 개인적으로만 갖고 있었던

역사교육에 관한 생각을 서슴없이 터놓을

'협력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교육이라는 매개 요소가 없었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교육이 미래를 바꿨다.


비록 학창 시절의 필자는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했지만,

그는 필자와 같은 배경을 가졌음에도

일정한 교육 인프라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나마 덜 고생했다.

역사교육에 관한 신념을 갖고 제3지대 교육에 몸담으면서

그라는 '미래'를 낳았고, 과거의 필자를 위로했다.

교육자가 제자의 성장으로 얻는 보람을 몸소 체감했다.


후일에 그는

필자가 집필진들에게 적극적으로 주선하고,

필자가 그간 일하며 쌓아온 신뢰(평판) 덕택에

검토진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장의 글에서 사용할 부제인

'짧은 절정기'에서 상세히 얘기할 예정이다.


그도 처음에는 검토 업무가 쉽지 않았다고 했지만,

한두 달 정도 하면서 감이 생겼고,

계약이 만료되기 전에는 업무에 통달했다.

일을 하면서 필자에게 소회를 남겼는데,

'금단의 지식'을 아는 기분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제3지대 교육이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이다 보니,

그 분야를 직접 접할 때 '기밀 정보'를 알아가는 느낌을 받기 마련이다.

필자 역시도 그렇다.


또 비슷한 문제의식을 종종 공유했다.

'사학과에서는 교육 분야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여전히 역사교육 인프라가 부족하다.' 등으로

이야기를 할 때는 답답함이 싹 풀렸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사학과에서는

이런 얘기를 해봤자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한편, 필자가 집필진으로서 있을 시간은 점점 끝을 향해갔다.

사람이 죽음에 이르기 전에 상태가 일시적으로

좋아지는 걸 회광반조(回光返照)라 한다.

2024년 5월부터 8월까지, 이 3개월은

필자가 끝을 알고 집필진으로 있으면서

가장 밝은 빛을 냈던 짧은 절정기였다.


다음 장에서 부제를 바꾸어 글을 이어가보겠다.


(이 글은 학과 후배의 허락을 받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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