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은 맞벌이하는 우리 부부 대신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 주시고 돌봐주셨다. 아침에 우리 집까지 오시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평일은 우리와 함께 지내셨다. 장모님과 함께 사는 동안 장모님께 제일 많이 들었던 것은 밥 먹으라는 말이었다.
나는 아침을 잘 챙겨 먹지 않았다. 장모님께서 차려주시는 아침이 익숙하지 않아 초반에는 사양했지만 함께하는 세월이 길어지며 점점 아침밥이 익숙해졌다. 아침 메뉴는 항상 같다. 된장찌개, 오이무침, 참치 전, 밥.
장모님께서 아이를 봐주셔서 우리는 회사에서 마음 편히 일할 수 있었고, 아이는 쑥쑥 자랐다. 장모님께서는 아이를 봐주시는 와중에 밥도 차려주셔서, 그 덕에 나와 와이프는 어머님이 해주시는 밥을 매일 먹을수 있었다.
장모님은 다리가 불편해 오래 걷지 못하셨고 당뇨와 기타 지병으로 정기적으로 병원 진료를 다니셨다. 식사 후에는 약을 한 움큼씩 드셔야 했다.
비록 다리가 아프시고 약을 지속적으로 드셨지만 큰 병은 없었던 장모님은 올해 초 암 진단을 받으셨다. 예후가 좋지 않은 '육종암'이 거의 말기에 가까울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한 달도 되지 않아 3번의 수술을 했고 수술 후에도 의사의 긍정적인 답변을 듣지는 못했다.
장모님은 희망을 잃지 않으셨다. 몇 년 후 당신의 칠순에 제주도 여행을 가자고 하시며 건강하게 나을 거라고 확신하신다. 방사선 치료 후 항암 치료를 결정할 시기가 왔다. 항암 전 의사는 항암 치료를 권하지 않는다. 이미 다른 장기에 전이가 많이 되어 희망이 없다고 했다.
가족들은 장모님을 보내드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치료를 중단할 수 없었다. 한 톨의 희망에도 기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항암 치료하기로 결정했다.
체력이 좋지 않은 탓일까? 항암의 부작용이었을까? 장모님의 몸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고 이내 혼수상태에 빠지셨다. 장인어른과 처남, 와이프가 교대로 어머님을 간호했고 이따금 와이프와 연락할 때면 전화기 사이로 장모님의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혼수상태에 빠지신 지 얼마 후 장모님은 긴 여행을 떠나셨다. 빈소가 마련되었고 나는 손님을 모시며 시간을 보냈다. 크게 슬프거나 힘들다기보다 그저 멍했다. 힘들어하는 와이프와 처남과 함께 장례절차를 챙겼고, 습관적으로 조문객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장모님과 함께 보냈던 세월이 짧지 않고, 같은 집에서 몇 년간 함께 살았는데도 무덤덤한 내가 냉정해 보이기도 했다.
장모님의 동생분이 빈소를 찾으셨다. 그 이모님은 장모님과 각별히 친하신 분이다. 빈소 밖에서부터 통곡하시며 들어서는 이모님을 보며 가슴이 저리기 시작했다. 이모님의 슬픔이 기폭제가 되어 장인어른, 와이프, 처남이 모두 울기 시작했고, 빈소는 다시 깊은 슬픔에 잠겼다.
처남과 장인어른이 이모님을 모시고 테이블로 안내했고, 빈소에는 덩그러니 나만 남았다. 장모님의 영정사진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갑자기 장모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사위도 어서 밥 먹어
불과 얼마 전에 들었던 장모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장모님께서 내게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이 들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오열하기 시작했다. 슬픔의 빗장이 벗겨진 후 벽에 기대어 한참을 울었다.
내 역할은 부인을 잃은 장인어른과 엄마를 잃은 와이프와 처남을 보살피며 장례 절차를 도우는 거라 생각했다. 그저 조용히 그들을 위로하며 힘이 되고 싶었는데 이런 내게도 갑자기 깊은 슬픔이 밀려온다.
사위인 내가 앞장서 장모님의 영정사진을 들고 화장터로 향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뼈를 곱게 갈아 선산에 모셨다. 자식들이 알아볼 수 있게 비석도 마련해놓고 자식과 손자, 손녀의 이름도 새겨두었다.
이제 앞으로 장모님이 해주시는 밥을 먹지 못한다. 하지만 장모님의 목소리를 잊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듯하다. 당분간 밥 먹으라는 말이 슬퍼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