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문학의 밤
대학 시절, 스페인 대사관 주최로 열린 ‘음유시인의 밤’이라는 시낭송 공연이 있었다.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낭만 가득한 저녁 행사였다.
1990년대 스페인 문학은 정치적 자유가 안정된 시대 속에서 과거를 노래하며 현재를 성찰한 음유시인의 목소리와 닮아 있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스페인 문학은 내전과 독재의 기억을 재조명하면서도, 민주화의 자유를 넘어 성찰과 소통, 국제적 확장으로 나아간 시대라 할 수 있다. 억압과 고통의 그림자를 넘어, 문인들은 다시금 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감정과 자유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사랑과 상실, 고독과 희망 같은 보편적인 주제가 서정적으로 변주되었고, 그것은 어느 시대, 어느 젊음에게도 쉽게 닿을 수 있는 언어였다. 그날 공연장을 가득 채우던 사람들의 관심 역시, 아마 그 흐름의 연장선에 있었을 것이다.
시와 음악이 어우러진 무대를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공연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나는 교수님을 도와 행사를 준비한 스태프였기에 지정석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이 특별한 순간을 더 많은 이들이 편하게 누릴 수 있도록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었다. 결국 우리가 앉게 된 곳은 2층 구석, 좁은 계단 위였다. 그러나 그 자리는 오히려 사랑의 추억을 간직하게 해 준 가장 특별한 좌석이 되었고, 낭만은 그곳에서 더욱 깊어졌다.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화려한 무대가 아니었음에도, 아니 어쩌면 그 화려함이 없었기에 오히려 더 오래 남았는지도 모른다. 불편하고 차가운 계단 위, 사람들의 발걸음을 피해 몸을 좁혀 앉아야 했던 그 자리에서 나는 뜻밖에도 삶에서 따뜻한 순간을 만났다. 함께 있던 이의 체온, 우리를 감싸던 공기, 어둑한 조명 아래 낭송되던 음악과 시,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낯선 떨림까지..... 사소한 것들이 하나하나 겹쳐 이루어낸 풍경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삶은 언제나 그렇게 흘러가며, 몇 개의 장면들을 우리에게 남겨둔다. 그리고 그 장면들은 대개 화려하게 준비된 무대 위가 아니라,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과 장소에서 불현듯 찾아온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닫게 되지만, 우리 삶에 남게 되는 완벽한 인생의 장면들은 불현듯 찾아온 우연의 순간들 속에서 피어난다. 우리가 함께 앉아 있던 그 계단, 불편하고 초라했던 그 자리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무대였던 것처럼.
그래서 지금도 때때로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인생이란, 편안하고 완벽한 순간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낯선 순간들 속에서 더 깊은 빛을 남겨두는 것이 아닐까. 그날의 떨림은 세월이 흘러도 내 안에서 잔잔히 메아리치며, 삶의 의미를 조용히 일깨워주고 있는 듯하다.
그 시절, 우리와 심심상인하며 아름다운 작품을 써내려간 스페인의 저명한 시인이자, 현 세르반테스 문화원장인 루이스 가르시아 몬테로(Luis García Montero)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Está solo. Para seguir camino
se muestra despegado de las cosas.
No lleva provisiones.
Cuando pasan los días
y al final de la tarde piensa en lo sucedido,
tan sólo le conmueve
ese acierto imprevisto
del que pudo vivir la propia vida
en el seguro azar de su conciencia,
así, naturalmente, sin deudas ni banderas.
Una vez dijo amor.
Se poblaron sus labios de ceniza.
Dijo también mañana
con los ojos negados al presente
y sólo tuvo sombras que apretar en la mano,
fantasmas como saldo,
un camino de nubes.
Soledad, libertad,
dos palabras que suelen apoyarse
en los hombros heridos del viajero.
De todo se hace cargo, de nada se convence.
Sus huellas tienen hoy la quemadura
de los sueños vacíos.
No quiere renunciar. Para seguir camino
acepta que la vida se refugie
en una habitación que no es la suya.
La luz se queda siempre detrás de una ventana.
Al otro lado de la puerta
suele escuchar los pasos de la noche.
Sabe que le resulta necesario
aprender a vivir en otra edad,
en otro amor,
en otro tiempo.
Tiempo de habitaciones separadas.
그는 홀로 길 위에 서 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세상과 거리를 두고,
아무런 짐도 없이 걸어간다.
날들이 흘러가고
하루의 끝자락에 그가 지나온 일을 떠올릴 때,
그를 울리는 것은 오직
불현듯 찾아온 그 우연한 순간,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 있었던
그 의식 속의 확실한 우연뿐이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빚도, 깃발도 없이.
그는 한 번 사랑이라 속삭였고,
그 순간 입술은 재로 가득 메워졌다.
그는 또다시 내일이라 말했으나,
그 눈빛은 오늘을 끝내 부정한 채
손안에 남은 것은 붙잡을 수 없는 그림자뿐,
허상처럼 흩날리는 환영들,
구름으로 이어진 길 하나뿐이었다.
고독과 자유.
그 두 단어는 언제나
여행자의 상처 입은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감당하지만,
그 어떤 것에도 확신하지 않는다.
오늘 그의 발자국에는
비어버린 꿈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길을 이어가기 위해
자신의 삶이 낯선 방에 숨어드는 것을 받아들인다.
빛은 언제나 창 너머에 머무르고,
문 건너편에서는 밤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는 깨닫는다.
다른 나이,
다른 사랑,
다른 시간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
분리된 방들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