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싱과 티팬티
40대 싱글로 살다 보면 나는 늘 제 자리인데 가정을 꾸린 친구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주로 친구 아이의 성장을 볼 때가 그렇다.
난 변화 없는데 사람들은 뭔가를 이뤄내고 있구나.
물론 아무것도 안 해도 아이는 큰다.
그저 시간의 흐름만큼 가시적인 성취가 없는 나 자신에 대한 한탄이 만든 생각이다.
만족할 만한 성취를 누린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나는 정말 소소한 것에 성취를 느끼며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막혔던 일이 풀리면 나 홀로 성취감을 느끼며 기뻐했고,
좋은 스토리가 떠오르지 않아 고생하다가도 썩 괜찮은 생각이 떠오르면 성취감을 느꼈다.
게임이 잘 되면 또 그랬다.
도파민과 성취감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20대 때부터 도파민에 절여 있었기 때문에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해진 것일까.
매사에 무덤덤해지는 것이 불혹이라는 것일까.
소소한 성취마저 느끼지 못한 다면 앞으로 남은 삶에서 어디서 즐거움을 찾아야 할까.
권태에 찌들어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무작정 변화를 감내해 보기로 했다.
대단한 변화를 준 건 아니었다.
해보고 싶었던 피어싱 뚫기, 20대 때부터 수 차례 도전했던 티팬티 입기 따위의 정말 사소한 변화.
정말 사소한데 정말 더럽게 불편했다.
피어싱은 스치기만 해도 너무 아파서 머리 감을 때도 조심, 머리 넘길 때도 조심, 마스크 쓸 때도 조심했다. 무의식적으로 건드렸다간 아파서 소리도 못 지를 정도였다.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도넛 베개 아니면 잘 수가 없다.
이제는 그동안 고생한 시간이 아까워서 관짝에 들어갈 때까지 피어싱을 하고 있을 생각이다.
레깅스를 즐겨 입던 나는 아무도 보지 않지만 혼자 팬티 라인이 신경 쓰여서 몇 번이고 티팬티 입기를 도전했었는데 전부 실패했었다.
온 신경이 팬티에게 가 있는 그 기분은 정말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걸을 때마다 뭔가 끼어 있는 찜찜함에 뒤를 돌아보고 슬쩍 빼길 한 달.
정말 거짓말처럼 적응했다.
세상 편하다.
인간이 적응 못하는 건 없다는 진리를 한 번 더 깨달았다.
뭐 하러 그런 고생을 하냐고 다들 물었다.
그런데 그 기분이 정말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하잘 것 없는 변화지만 내가 그것을 무난히 받아들였다는 자신감.
조금 더 큰 변화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결국 성공했다는 성취감.
우리 뇌는 매우 바쁘다.
가만히 숨 쉬고 앉아있기만 해도 뇌는 최선을 다해서 움직이고 있다.
그 상황에서 밖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처리하려면 효율이 가장 중요해진다.
그래서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뇌 멋대로 필요 없는 정보는 다 거르고 늘 했던 생각 패턴을 따라간다.
그렇게 변화를 거부하는 꼰대가 되어 간다.
30대 들어설 때부터 청바지도 입지 않았다.
허리를 죄는 그 느낌이 싫어서 편한 바지만 입었다.
관상용으로 사던 하이힐도 포기했다.
나이가 들수록 불편함에 대한 관용이 없어진다.
편한 것만 찾다 보니 인생이 더 단조로워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어싱과 티팬티로 불편함이 가져다주는 변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매우 관성적인 인간이라 관성을 깨뜨릴 스모킹건이 필요했는데 피어싱과 티팬티가 그 역할을 해준 것이다.
어쨌든 그 후 인생의 관성을 깨부술 만한 변화를 겪고 있긴 하다.
결과가 불투명하기에 하루에 몇 번이고 의문을 가지지만 어차피 남는 건 시간이요, 안 해 본 거 없이 다 해보고 죽자 마인드로 살기로 했다.
기혼자들은 정말 극심한 변화의 파도에 올라타 있다.
인간관계와 생활 패턴이 송두리째 바뀔 만한 이벤트가 결혼이니까.
그들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결혼은 필연적으로 변화를 가져온다.
반면 싱글은 그 정도로 큰 변화의 파도를 맞을 일이 없다.
어떠한 사소한 변화도 감내할 생각 없으면서 무미건조한 일상을 탓한다.
다른 걸 해보라는 권유에도 '그건 별로 안 내켜서..' '저는 그런 거 원래 안 해요..' '그건 좀...'
그리고는 자신이 외로운 이유가 연인이 없어서, 결혼을 안 해서라고 화살을 돌린다.
남 탓만 하는 사람은 뭘 하든 남 탓만 한다.
자신의 문제를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으려고 하면 점점 더 외로워질 뿐이다.
나 자신을 바꾸는 게 타인을 바꾸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물론 나처럼 자신의 문제에 골몰해서 주변 환경을 전혀 보지 않는 사람도 스스로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없다.
아주 작고 사소한 변화라도 좋다.
그 작은 변화가 권태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점차 더 큰 변화를 겪을 용기를 만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