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이 보는 아이의 의미
'애 때문에 살지'
결혼한 친구들이 하나같이 하는 얘기다.
굳이 결혼을 해야 되나? 굳이 애를 낳아야 하나? 좋은 사람 만나면 하고 아님 말지라는 생각으로 살아온 나에게 저 말은 결혼에 대한 비토를 높이기에 충분했다.
인생은 80%의 권태, 12%의 분노와 짜증, 8%의 즐거움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권태롭고 고통이 더 많은 삶을 또 다른 생명에게 지우게 하는 옳지 않다고 여겼다.
아이를 키울 여건이 된다면 입양이 더 낫지 않을까, 이미 태어나 좋든 싫든 삶의 고통을 짊어져야 하는 생명이니까 어깨를 나누며 같이 살아간다면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정도의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전에 함께 있으면 즐겁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가치관까지 잘 맞는 반려를 만나는 건 기적과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에 평생 남 탓 하며 살 바에는 내 탓하며 살 자로 마음을 먹었다.
웃기게도 삶의 반쪽이었던 게임을 떠나보낸 뒤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매다가 아이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사랑을 쏟아부을 대상이 필요하다'
이 생각으로 게임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자신을 성찰하고 과거를 돌아보고 난리 부르스를 추었는데 아이는 무조건적으로 나를 사랑하고 무조건적으로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존재다.
그 존재만으로 결핍되어 있던 사랑이 채워진다.
남편이, 아내가 마음에 안 들어도 아이가 주는, 아이에게 주는 사랑하나로 인생이 한층 충만해지는 것이다.
이미 부모가 된 사람들은 당연한 얘기를 뭐 그리 장황하게 하나 싶겠지만 싱글의 입장에서 아이가 주는 행복이란 상상 못 할 영역이기에 '애 때문에 산다'라는 말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 애가 되는 건 매우 거부감이 들었기에.
아이가 나이를 먹고 한 명의 인격체로서 성장하게 되면 유전자와 경험으로 인해 자신만의 판단을 내린다.
무조건적이어야 할 부모의 사랑이 그렇지 않다고 느끼게 되면 부모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옅어지거나 철회될 수도 있다.
나의 엄마가 그랬다.
엄마가 흡족할 만한 성과를 가지고 오면 우리 공주님이었고, 마음에 안 드는 언행을 하면 날 선 비난들이 매섭게 날아왔다.
엄마가 기분이 좋으면 우리 공주님이었고, 엄마가 기분이 나쁘면 천하에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엄마의 이런 성향을 파악했다.
늘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당신과 다른 의견을 말하면 '니는 애가 이상해서 그렇다'라고 대화가 끝났다.
머리가 커지면서 점차 엄마를 피하였고, 지금도 엄마와 통화를 자주 하지 않는다.
한 번 통화하면 지친다. 나의 현 상황이 탐탁지 않은 엄마가 비난 퍼레이드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코인 그래프처럼 언제 오르고 내릴지 모르는 엄마의 감정이었으나 그 안에 담겨 있던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가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에서 누군가가 엄마가 나를 대하듯 대하였으면 이미 손절, 평생 원수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라는 이유로, 부모라는 이유로, 안 좋은 기억들 틈에서 따스함 한 조각만으로도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주는 아이는 정말 대단하다.
물론 엄마는 전화 한 통 안 하고 내세울 거 하나 없는 딸을 부끄러워하며 자식 키워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말을 달고 살지만, 나 또한 애정 표현을 전혀 안 하기에 억울하진 않다.
그래도 엄마는 나를 사랑하고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서로가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다.
'애 때문에 살지'
라는 말을 더 이상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라니 인생을 걸 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는 으레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당연한 존재로 생각된다.
아이도 성장하며 '타인'이 되어 간다.
그래도 그 소중함과 얻은 사랑은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나와 엄마처럼 뭔가 핀트 나간 사랑이 아닌 온전한 사랑을 아이와 나누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