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성공
아 이 글을 우리 쫄보가 보면 엄청 싫어하겠지만, 중요한 건 그 쫄보도 북한산 원효봉에 발을 디뎠다는 것이다. 이제 막 십 대에 들어선 우리 쫄보는 어렸을 때부터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큰 아이였다. 놀이터에 도착하면 30분은 가만히 서서 여기저기 살펴보고 나서야 놀기 시작했고, 배꼽친구와 오랜만에 만나도 두 시간은 주변에서 서성이고 나서야 전처럼 신나게 놀곤 했으니까.
벌레도 싫어하고 강아지도 무서워하고 낯선 환경도 두려워하는 우리 쫄보를 매주 한번 산에 데리고 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날부터 어떤 산을 갈 것인지 전에 경험해본 산에 비해 얼마나 어려운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고 차로 이동하는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까지 파악하고 나서야 가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내가 쉬 대답해줄 수 없었던 것은 어떤 산인지에 대한 경험치였다. 나 역시 등산 초보였기에 얼마나 어렵고 어떻게 다른지는 도통 가늠이 안됐다. 미리 곽 선생님께 여쭤보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는데 보통 우리가 가는 산들은 낮고 크게 어렵지 않은 산이었기에 선생님도 미처 가보지 못한 산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어찌어찌 달래어 겨울방학 원정의 모든 산행을 마무리했다.
아이들이 몇 번의 산행과 트레킹을 한 후 선생님이 이제는 봉우리 하나쯤 오를 수 있겠다 싶어 도전했던 북한산 원효봉. 나 역시 북한산 족두리봉밖에 오르지 못했던지라 그날은 시작부터 조금 긴장을 했었다. 천천히 오르며 아이와 이야기도 많이 나눴고 겨울에도 아름다운 북한산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우리는 북한산 국립공원 북한산성 분소에서 출발하여 내시묘역길을 따라가다 서암문을 지나고 계단을 올라 성랑지(성곽에 딸린 초소로 병사들의 숙소터)들을 거치고 아찔한 원효대를 건너 원효봉에 올랐다. 이번 산행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데크길이 아닌 흙길을 따라 산을 오르고 돌계단도 무척 많았다. 전에 다녀온 산들에 비하면 바위도 많고 경사도 가팔라 아이들이 더 자주 쉬자고 했었다. 다독이며 오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마음으로 끌고 가는 것이니까.
멋진 풍경이 보이는 곳까지 올랐을 때 우리는 풍경에 취해 서울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어른들은 그때 힘든 과정도 다 잊힐 듯 감동하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멋진 서울시내의 모습과 병풍처럼 둘려진 봉우리들을 보아도 어른보다 감흥이 적은 것이다. 간식으로 달래고 다 왔다는 이야기로 꼬셔가며 드디어 커다란 돌바위인 원효대에 도착했다.
유독 이날은 우리 쫄보가 초반에 앞장서 씩씩하게 걸었다. 중간 즈음 지날 때부터는 나와 함께 원정대 가장 마지막으로 걸었지만 가장 잘하는 끈기 있게 꾸준히 잘 걸어주었다. 가장 늦게 원효대에 도착해 보니 몇몇 아이는 벌써 올랐다 다시 내려왔다고 했다. 당연히 정상인 줄 알았으나 정상을 가기 위해 꼭 건너야 하는 곳이었던 것. 아찔한 높이에 로프를 잡고 바위산을 천천히 올라야 하는데 바람이 거세게 불기 때문에 어른도 똑바로 서서 걷기 어려운 곳이었다.
높다랗게 보이는 바위산을 우리 쫄보도 한 걸음 한 걸음 로프를 잡고 내디뎠다.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다들 기다려 주며 함께 올랐다. 그러나 바위 하나를 넘어가려고 보니 발아래 아무것도 없는 이 곳을 넘어가야 하는 상황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먼저 올라간 아이들을 챙기러 원효대에 올라 있었던 터라 쫄보의 상황을 다 파악하지 못한 채 다 같이 내려가자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되돌아 내려갔다.
내려와 보니 쫄보는 이미 눈물바다. 포기하고 다시 돌아 내려가야 하는 것인지 모두에게 민폐인 이 상황이 나도 속상했다. 사실 나는 거의 포기 상태로 내가 혼자 쫄보를 데리고 내려갈 테니 원효봉에 다녀오시라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우리 원정대의 특성상 누군가를 두고 가는 것은 서로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곽 선생님이 우리 쫄보에게 천천히 이야기를 했다.
"여기까지는 내가 앞에서 아저씨가 뒤에서 너를 보호하며 올라갈 거야, 저기 위에 올라가서는 이 손으로 이렇게 잡고 발을 이렇게 디뎌 미끄러지지 않도록 해야 해. 너는 할 수 있어. 정 무서우면 거기에서는 내가 엎고 갈게. 겁내지 마 너는 할 수 있어."
아마 우리 가족끼리 왔었다면 아마도 우린 거기서 발을 돌려 내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 아빠가 아닌 다른 어른의 진심 어리고 믿음직스러운 말들은 쫄보에게 큰 위로와 자극이 되었고, 아이는 용기를 냈다.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그렇게 우리 쫄보는 엄마의 손이 아닌 선생님의 손을 잡고 아니, 본인이 로프를 잡고 원효대에 올랐다. 올라서 거세게 부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아래를 내려보고 곧이어 오를 원효봉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어느새 눈물은 멈춰 있었을 것이고 스스로 올랐다는 성취감이 온몸을 감쌌을 것이다.
원효대를 오르고 나니 원효봉은 너무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쫄보가 자신감을 얻고 나자 원효봉에 올라 바위 위에서 혼자 사진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 모두 너무 고생하며 올라왔기에 어른들도 너무 행복했고 아이들이 자랑스러웠다. 원효봉에서 아름다운 북한산을 바라보며 한참을 사진 찍고 내려왔다. 쫄보가 스스로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끝까지 원정대와 함께했음에 다른 아이들도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원효봉을 다녀온 지 벌써 넉 달이 지났지만 지금도 쫄보에게 나는 이 말을 많이 쓴다.
이제 아이가 두려워하는 일을 포기하려 하면 조금 더 북돋아줄 수 있을 말을 알게 되었고 포기를 종용하던 나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어떤 일이든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