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움직여 흐르는 땀이 만들어낸 나만의 역사
♬엄마 곰은 뚱뚱해~~♬
일곱 살 아이는 좋아하던 ‘곰 세 마리’ 노래를 개사해 엄마를 놀리기 시작했다. 마침 그때는 새해가 시작된 지 일주일도 안 된 날이었고, 새 다이어리에 적힌 올해의 계획 ‘운동’은 유독 볼드체로 쓰여 있었다.
처음엔 그저 다이어트를 위해 운동을 선택했다. 매일 아침 출근하고 퇴근 후에는 아이들과 약간이라도 시간을 보내야 하는 워킹맘이 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새벽뿐이었다. 폭풍이 휘몰아치듯 매일 아침 아이들을 깨우고 씻기고 먹인 후 달려 지하철에 몸을 싣고 나서야 휴대폰을 들여다볼 여유가 생기는 워킹맘이 새벽에 운동하고 출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하거나 안 하거나 두 가지 선택뿐.
걷는 것 말고는 몸을 쓰고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새벽 운동을 생각했다는 데 이미 나는 알을 깨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운동과 담을 쌓았다, 운동과 안 친하다, 할 줄 아는 건 숨쉬기 운동뿐이라는 이야기는 모두 내 이야기였다. 학창 시절 가장 싫어한 과목은 체육이고 가장 싫어한 행사는 단연 체력장이었다. 오래 달리기와 윗몸일으키기 빼고는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으니까. 그래도 부모님께 물려받은 지치지 않는 체력 덕에 할 줄 아는 운동은 없어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출산 전까지는.
자연분만, 모유 수유를 거쳐 백일의 기적을 맛본 후 이어진 육아의 전쟁 속에도 나가떨어지지 않은 나는 타고난 체력으로 버텼다. 하지만 아이들이 커가면서 ‘회사 퇴근 육아 출근’ 일상을 계속 버티다 보니 나의 체력에도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늘 피곤했고, 개인적인 일은 거의 취소하거나 미뤘으며, 가장 기다리던 아이들과 보내는 주말 일정에 열정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여가 시간을 좀 더 활기차게 보내고 싶었다. 아이들과 있을 때 금세 지치고 싶지 않았다. 피곤해서 미뤄둔 나의 일상도 되찾고 싶었다. 이런 욕망을 눈꺼풀에 담아 밤 10시에는 침실의 불을 껐고, 새벽 6시 헬스장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해뜨기 전에 도착한 헬스장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기분은 생각보다 상쾌했고, 한 달이 넘어가니 헬스장에 안 가는 날이 오히려 더 피곤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6개월쯤 유지하니 군살도 적당히 빠지고 아침마다 스스로 일어나는 아이들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적은 시간이라도 매일 해내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라도 결과보다 더 큰 성취감을 준다. 매일 하는 운동은 나의 체력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운동의 재미를 알려주었고, 또 다른 의미의 자신감도 심어주었다.
그즈음 지인의 추천으로 마라톤 5km 코스에 가족 모두 참가했다. 완주 메달을 받아 든 순간, 나의 또 다른 알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라톤은 대단한 체력의 소유자들만 참가하는 그들만의 리그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달리고 나니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우리 가족은 매년 새해 마라톤(5K)에 참가한다. 벌써 참가 5년 차가 되었고, 나와 남편은 10km 마라톤을 매년 달리고 있다. 그러니까 운동 고자 워킹맘 엄마가 매년 2회 이상의 마라톤을 달리는 것이다.
국내에는 다양한 마라톤 대회가 있고, 풀코스 마라톤을 달리는 러너들이 꽤 많다. 풀코스를 뛰는 전문 러너들에 비하면 나는 꼬꼬마 러너지만, 매년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준비해서 조금씩 거리를 늘려가는 기특한 러너기도 하다(라고 스스로 칭찬한다).
마라톤의 매력은 나처럼 전혀 관심 없는 사람도 어떤 코스든 한번 달리고 나면 참가자들의 열정과 성취감에 이끌려 다음 대회에 또 신청하게 된다는 데 있다. 2019년 춘천마라톤과 2020년 새해 마라톤까지 달리고 제대로 달리질 못해 못내 아쉬울 정도니 말이다.
작년에 달리지 못해 아쉬운 마음은 산으로 나를 이끌었다. 육아휴직한 엄마와 대국민 바이러스 시국에 학교도 못 가는 아이들을 데리고 매주 한 번씩 산에 다니며 평소에 내가 놓쳤던 아이들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고, 달리기로 다져진 다리 근육을 등산에 맞게 적응시키기도 했다. 초등 저학년이 등산을 얼마나 따라갈까 싶었지만, 연속 12주의 일정을 모두 무사히 소화해냈다. 오히려 내가 등산의 매력을 맛보게 되어 얼마 전 친구와 등산을 위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의 시작은 내가 운동이란 걸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어떤 이유로든 나는 몸을 움직여 땀을 내는 운동을 시작했고 나아가 마라톤과 등산에 도전하며 내 삶에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꾸준히 운동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운동 없이 여유롭게 살던 아늑한 알 속 세상을 거부하고 조금 힘들지라도 또 다른 세상에 발을 디디게 된 것.
나는 몰라서 못 했지만, 내 아이들은 나와는 다르게 몸을 쓰며 땀을 흘리는 건강한 재미를 어려서부터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분 좋은 생각이 든다.
여성 독립매거진 2W 매거진 9호 <알을 깨고 나온 여자들>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