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말하는 이유가 있다
고추 짜르면 뭐가 되게”
깜짝 놀라서 방금 말한 녀석을 부른다.
친구들과 분리시켜 놓고 왜 그게 궁금한지 물었더니
잘린 고추에서 아프로디테가 태어났어요.
징그럽고 수상해요.“
아! 안도의 웃음이 나왔다.
방학 동안 그리스로마신화를 읽고 온 녀석들이 많다.
내게도 어릴 때 그리스로마신화는 이 녀석이 느낀 것처럼 금기서 같았다. 만화 속 신들의 몸 몇 부분만 가려놓은 헐렁한 천이 금방 흘러내려 알몸이 보일 것 같았다. 여성의 가슴이나 남성의 근육이 과하게 풍만하고 울룩불룩해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큰 타월로 한쪽 어깨를 드러낸 신의 패션을 따라한 후 동생 앞에서 타월을 확 펼치는 장난을 치다가 동생이 꽥 소리질러 혼난 기억이 있다.
“포도맛 술이라니, 술 먹고싶어.”
“눈감고 메두사 목을 싹둑 잘라버려야지!”
“우라노스는 가이아 아들인데 엄마랑 결혼했어. 나도 엄마랑 결혼하고 싶어.”
“크로노스는 자식을 먹을 때 안 씹었나봐. 그러니까 다시 뱉으지. 사람은 무슨 맛일까?”
불안불안해서 딴 주제로 돌린다.
“어떤 신이 제일 맘에 들어?”
“포세이돈이죠!” (삼지창으로 찌르는 포즈)
“지옥에 간 하데스! 머리 3개 달린 개가 멋져요.“
“난 신들의 신, 제우스!”
한 녀석이 정색한다.
“제우스는 부인이 많아. 신들은 바람을 많이 펴.”
“아들인 아레스도 자기 형, 헤파이스토스랑 결혼한 아프로디테와 바람 펴.”
“결혼하고 딴사람 사랑하면 안 되는데.”
“저는 바람 절대 안 필 것이에요.”
우리반 1호 커플(8세)이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본다.
8세들과 놀이시간 30분간 이런 주제로 대화가 가능하다.
영어로 된 신들의 이름과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외우는 것도 신기한데 신화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나에게 설명해주는 아이들이 기특하다. 조각상을 사랑한 조각가 피그말리온, 호기심이 불러온 재앙 판도라의 상자, 무엇이든 황금으로 만드는 미다스의 손 이야기 등은 어휘력의 배경지식이 된다.
“바람은 뜻 두 개야. 공기가 움직이는 좋은 뜻이랑 약속이 움직이는 나쁜 뜻.”
“고추도 뜻 두 개야! 이~”(아까부터 고추에 꽂힌 녀석의 손이 바지 쪽으로 향하길래 내가 막는다)
휘몰아치는 대화 중 혹시 모를 돌발 발언이 두려워 내내 긴장 상태로 들었더니 피곤이 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