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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콩대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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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예랑 Feb 09. 2024

이모land

02. 영상 1도. 바람이 차다.

  호텔 방문 앞에 선 나는 양손을 맞잡고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Oh, I'm so nervous." 그때 문 안쪽에서 방 안을 걷고 있는 듯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언뜻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H를 바라보자 H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한 번 더 벨을 눌렀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그 안에는 T가 서 있었다. 그러나 내가 T를 볼 새도 없이 별안간, 침대 위에 앉은 작은 외국인 여자아이가 양팔을 번쩍 들고는 한국말로 "예랑 이모! 예랑 이모!"라고 외치고 방방 뛰며 나를 맞이하였다. 나는 이토록 감격스러운 환영에 너무도 놀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5년 전 H는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걷기 시작할 즈음 코로나로 인해 온 세상이 봉쇄되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날 때에도 세상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H와 영원한 이별을 하는 줄 알았다. 우리가 만나지 못하는 동안 H는 나에게 많은 영상을 보내 주었다. H가 보내 주는 그 영상들 속에서 아이는 자라고 있었다. 핸드폰 영상 속 엄마 품에 안겨 있던 아주 작은 여자아이는 어느새 한 발 한 발을 떼며 아슬아슬하게 걷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색칠을 하며, 장난감 퍼즐을 맞췄다. 그러고는 어느새 아빠와 작은 놀이 기구를 타거나 친구들과 물놀이를 했다. 유치원을 처음 가던 날 아침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웃더니, 하원하는 차 안에서는 펑펑 울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이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마치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H와 나는 종종 영상 통화 또한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한국말을 좋아하는 H는 아이에게 나를 'Mom's best friend, 예랑 이모'라고 소개하였다. 아이는 그렇게, 말을 뗄 때부터 유일한 한국말 '예랑 이모'를 함께 배웠다.


  H는 언제나 몹시 한국에 오고 싶어 했고, T는 온 가족을 위해 성실하고 바쁘게 일을 했다. 둘째 아이가 걷기 시작할 무렵 코로나로 인해 닫혔던 세상이 하나둘 열리기 시작했다. 둘째 아이가 확실히 걷게 되었을 때, H는 결국 한국에 오기로 다짐했다. H는 그 결심을 나에게 알렸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 H는 한국에 오는 비행기 티켓을 샀다. 둘째 아이는 그사이 조금씩 조금씩 말을 떼기 시작했다.

  몇 주 전 핸드폰 화면에 불쑥 나타난 둘째 아이가 H에게 다가가 어느 점을 가리키며 "Mole. Mole."이라고 했다. 그 모습을 본 H와 내가 크게 웃자, 아이가 화면으로 다가와 나를 들여다보았다. H는 그날도 어김없이 아이에게 "예랑 이모"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둘째 아이가 별안간 "mo(le) mo(le)"라고 말하며 나를 가리켰다. 그 말을 들은 H는 방이 떠나가라 크게 웃으며 "Yes, 예랑 모모."라고 답하였다. 그것이 둘째 아이의 첫 '예랑 이모'였다.

  H와 T가 한국에 온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가슴 뛰는 것은 H와 T의 아이들이 온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이곳에 온다. 내가 사는 나라, 이모의 나라, 한국에 온다.





  호텔 방문이 열리고 "예랑 이모. 예랑 이모."를 외치며 만세를 하는 여자아이의 소리에 놀란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뒤에 아주아주 작고 작은 남자아이 또한 "이모. 이모." 하며 서 있었다. 경이로웠다. 그러나 그렇게 감격에 젖은 채 서 있는 나보다 더 놀란 것은 H와 T였다. 아이들은 평소 낯가림이 몹시 심한 모양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처음 만난 나를 보고 입을 크게 벌리고 웃으며 양팔을 번쩍 들고 맞이하는 모습이, 한국말로 나를 부르고 있는 그 모습이 너무도 놀라웠던 모양이다. H와 T도 반쯤은 넋이 나가 있었다. 아이들은 정말 작았다. 실제로는 또래에 비해 컸으나, 나의 눈에는 아주 작고도 작았다.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질 만큼 작고도 작았다. 그런 아이가 나의 선물을 받고는 "Unicorn! Shiny!" 하며 아이처럼 외치더니, 어른처럼 한참 동안 선물을 바라보고는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이토록 엄청난 환대를 마친 H와 T와 나, 우리는 못다 한 이야기를 한참 동안 나눴다. 아이들은 그러한 우리 사이를 오고 갔다. 그것은 정말 믿기지 않는 풍경이었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그동안 H와 T, 그리고 나 사이에 없던 이 소중한 생명들이 어디로부터 와서 우리를 이토록 행복하게 만드는 것일까. 경이롭고, 경이로웠다. 나는 어떤 환희에 가득 찬 얼굴로 H에게 말했다. "Where did they come from? Where did cute people come from!" 그러자 H와 T는 크게 웃었다.


  어느덧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 되었다. 외출을 하려 하니 다들 정신이 없었다. H와 T는 익숙지 않은 두꺼운 옷들을 챙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사이 첫째 아이는 방 한가운데에 서서 내가 준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아이는 내가 준 가방 안에 내가 준 손난로를 담더니 외투도 입지 않고 가방부터 어깨에 메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괜스레 감격에 젖어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어 자신은 뒤로하고 2살 난 작은 아이를 부지런히 챙기고, 5살 난 작은 아이를 부지런히 챙기는 H와 T를 보니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T는 준비를 모두 마친 둘째 아이를 품에 안고 조용히 서 있었다. H는 첫째 아이의 부츠로 인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에 도무지 알 수 없는 감동이 일었다. 나는 H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Oh, You are a mother." 그러자 H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저녁 식사를 하는 우리의 풍경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영원히 젊을 것 같던 H와 T와 나, 세 사람의 풍경 속에 두 아이가 들어왔다. H와 T는 어느새 완연한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느낀 그 감정을 무어라 말해야 할까. 우리의 세월은 어느샌가 너무도 많이 흘러 있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감격과 생각에 젖은 나를 보던  H는 나에게 말했다. "You are my family."



  캄캄한 밤이 되었다. 헤어질 시간이었다. 우리는 어느 길에서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러나 우리는 곧 또 만날 예정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내 허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아이를 힘껏 끌어안으며 금방 또 보자 하고는 묵묵히 돌아섰다. 하지만 모두와 헤어져 어두운 골목골목을 걸으며 나는, 벌써부터 헤어질 생각에 슬픔에 젖어 들었다. 아이들은 자라서 어느샌가 어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와 H와 T는 점차 나이가 들 것이다. 


  지하철역을 향해 걷던 중 나는 길을 잘못 들어 너무나 멀리까지 걷게 되었다. 나는 길을 돌아가며 구태여 낯선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길을 잃을 만큼 더욱 낯선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컴컴한 골목은 간간이 놓인 간판의 불빛만이 간간이 골목 안을 밝히고 있거나 간혹 좁은 골목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불빛만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골목에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다만 밤늦도록 열중하여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유리문 안으로 보일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누구도 걷지 않는 컴컴한 길만을 따라 걸었다. 그것이 나의 인생이었다. 나는 참으로 별난 인생을 살았다. 그러한 나와 똑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P와 H를 만났을 때였다. P와 H는 이상할 정도로 나와 닮아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나의 또 다른 모습이자, 나의 세상의 일부였다. 그러나 P는 육 년 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나는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또 흘렀다. 어느덧 시간은 흐르고 H로부터 새 생명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처음 보는 하얀 눈과 언 땅, 처음 겪는 추위 속에서 힘차게 걷는다. 처음 듣는 언어의 물결 속에서 씩씩하게 걷는다. 참으로 어른 같은 아이들이다. 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아이들의 미래를 꿈꾸었다.



  밤중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 H와 다음 날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첫째 아이가 불쑥 나타나 인사를 한다. "예랑 이모. I miss you." 그러자 H가 아이에게 곧 나를 다시 만날 것이라 말하였다. 그러자 아이가 또다시 두 팔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부른다. 그러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화면 안에 다시 나타난 아이는 내게 무언가를 보여 주었다. 나와 자신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 곁에는 커다란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우리가 서로 그림을 보며 이야기를 나눌 때 어디선가 둘째 아이가 불쑥 나타나 작은 목소리로 "이모. 이모." 하고 말을 한다. 그러자 첫째 아이는 다시금 그림을 그린다. 그림에는 나와 자신과 동생과 하트가 있었다. 아이는 별안간 내게 말했다. "이모, I love you." H와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내가 감격에 찰 새도 없이, 둘째 아이가 옹알옹알 말을 했다. "모. Talk. later."


  우리는 곧, 또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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