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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존중하는 관계이고 싶다, 이 마음은 분명 사랑

아빠의 마지막 반성문이 정말 마지막이기를 바라며

마지막 반성문 이후, 총총이에게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이게 뭐 대단한 자랑이라고…) 물론 화를 낼 뻔한 순간들은 있었다. 억지로 참지 않았다. 그래도 화가 나지 않았다. 지난번 그 상황을 힘들게 겪고 나니 다시는 그걸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 사건을 통해 총총이가 나를 제대로 학습시킨 것이다.


그래도 총총이에게 쩔쩔매지는 않는다. 화를 내거나 또는 쩔쩔매거나, 이렇게 양단의 선택만 있는 것이 아니다. 25개월 총총이는 언어적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나의 말을 알아듣고, 자기 의사를 표현한다. 대화를 통해 어지간한 상황은 해결한다.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도록 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지만, 예전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나의 요청/감정을 정확히 전달하고, 기다리고, 타이르고, 조금 엉뚱하지만 결코 어렵지 않은 대안을 제시하면 총총이도 더 고집을 부리지 않고 금방 태세를 전환해준다.


(c) pixabay


예전에도 이런 수법들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는 왜 차분하게 시작해서 목소리가 높아지는 대립으로 끝났던 것일까. 놀라운 점은, 내가 불같이 화를 내고 기싸움으로 총총이의 고집을 꺾는 일에 성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총총이는 정말 단 한 번도 나에게 져주지 않았다. 내가 먼저 포기했다.


두 살 아이를 키우며 인간관계를 다시 배우는 느낌이에요.


“두 살 아이를 키우면서 인간관계를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서 내가 한 자기소개이다. 나는 총총이를 통해 인간관계를 다시 배우는 느낌이 든다. 마치 사람과의 관계가 처음인 사람처럼, 하나 하나 다시 쌓아 올리는 기분이다.


‘나도 살 만큼 살았다’, ‘나도 어른이다’, 그렇게 교만했다. 총총이 덕분에 내 부족함을 뼈저리게 확인했다. 눈앞의 두 살배기 하나도 어쩌지 못해서 버럭 소리나 지르는 주제인 내가, 사회가 뭘 어쩌고 저째? 가소로운 일이다. 겸손해야 한다. 인격 도야에 더 힘써야 한다.


이제 조금 알겠다. 사람은 각기 다르다. 저마다의 기질이 모두 다르다. 그래서 나와 다른 그 존재를 도무지 내 뜻대로 할 수가 없다. 내 뜻대로 하려고 할 때 비극이 시작된다. 주어진 다름을 인정하고 그 사람의 기질에 맞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노력이 곧 존중이다. 그러면서 그 사람과는 또 다른 나의 존재 역시 존중받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관계는 없을 것이다.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이건 ‘사랑’이 없이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 그렇다, 사랑. 나는 나의 아이를 사랑한다. 그래서 서로 존중하는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다. 어쨌거나 지금 그 시작의 열쇠는 나의 손에 있다. 이 기회를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가끔 화내고 실수해도 사과를 잘 하면 아이가 건강하게 큰대요! 지금도 충분히 멋진 아빠!”라는 오랜 친구가 남긴 코멘트가 큰 격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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