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수요일, 열 아홉 우리를 만나러 가는 길
아침부터 분주했다. 거실 한 구석에 개지 못한 빨랫더미와 마무리 하지 못한 대담 원고 사이에 저울질을 하다 빨랫더미 앞에 앉았다. 이게 자꾸만 눈에 들어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외할머니가 빨래를 개면 면 티셔츠 한 장도 다림질을 한 것처럼 반듯반듯 구김이 없었지...'
갑자기 손다림질이 생각나 빨래를 평소보다 더 정성들여 스윽스윽ㅡ 구김이나 접힘이 없이 한참을 펼쳐가며 개었다.
"엄청 정성들여 개네?"
씻으려고 욕실로 향하던 남편이 지나가며 한 마디 던졌다.
"응? 응."
짧은 대답을 하고 계속 개고 또 개다가 남편이랑 아침을 먹었다. 6시 45분 늦어도 50분이면 아침을 먹는 남편. 너무 이른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부터 같이 먹기 시작했다. 설거지도 바로 해 버리고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까지 책을 읽었다. 어쩐지 오늘은 느긋하게 글을 쓸 마음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피부과 예약을 했는데, 그냥 피부과가 아니라 20년지기 친구가 원장으로 근무하는 피부과다. 내 결혼식 때 축가를 불러주었고 결혼 전까지는 서로의 생일마다 만났던, 남자 사람이지만 여자 사람처럼 잘 지냈던.
수능을 마치고 결성된 남자 넷 여자 넷 무리는 대학 입학 전 무료했던 시간을 진주의 어느 막거리집을 시작으로 00배 농구대회까지 신나게 놀았다. 생일금을 걷어 모일 수 있을 때는 선물과 함께 파티를, 모이지 못할 때는 생일금 전달을 하며 20대의 대부분을 함께했다. 진주 촌것들이라는 뜻의 '진촌'이라는 이름으로. 스물 여섯, 스타트를 끊은 한 여자 친구를 시작으로 여자 셋과 남자 둘이 결혼을 했고 가정이 생기자 자연스레 모임은 해체되었다.
10년. 결혼 이후 처음 만나는 자리, 진료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려나 했는데 공장형 피부과라 상담 실장과 이야기 나누는 게 전부였다. 결제 후 사진 촬영 , 세안 후 머리띠 착용 후 베드에 누워 친구를 기다리고 있자니 점점 민망해졌다.
'뭐라고 인사하지?'
이렇게 저렇게 인사말을 떠올리며 누워있는데 거꾸로 친구 얼굴이 보이자 그냥 "00아~~~~~"하고 이름이 자동발사 되었다. 왜 그렇게 반갑던지. 서로 오랜만이다!를 남발하며 한참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첫번째는 얼굴이 뜨끈하고 말았는데 두번째는 눈물이 날만큼 요상한 감각으로 아팠다. 으어어ㅡ
"아파? 강도 좀 낮춰줄게. 더 이상은 안돼~ 그럼 효과 없으니까 참.아."
아파서 말 한 마디 안 나왔다. 그런데 그 시간이 너무 웃긴거다. 맨날 시덥잖은 소리나 했던 우리가 언제 이렇게 커서 네 말마따나 나는 '작가님'이 되고ㅎㅎ 너는 '원장님'이 되었니? 세월이란~~
"진주 촌것들 출세했다!!!"
라는 말은 마음 속에 묻고 혼자 찌잉한 마음으로 옛 시간을 거닐었다. 그 땐 그랬지, 이런 일도 있었고, 저런 일도 있었지 하면서 :)
"앞으로 네 모공과 홍조는 내가 책임질게"
친구 말에 웃음이 팡 터졌다.
"잘 부탁드려요~~~"
코로나 이후 혈관종이 생기고 대책없이 울퉁불퉁해진 피부를 계속 방치했다. 어차피 집에만 있고 애만 보니까 상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막상 이번주 연수원 촬영을 앞두고 마음에 급 변덕을 부렸다. 이거 몇 년 어쩌면 평생 vod로 남을텐데!!
도대체 피부과 시술은 뭐가 이리도 이름이 복잡하고 많은지... 결국 친구에게 sos를 쳤다! 그리고 갔다 ㅋㅋㅋㅋ 앞으로 친구 덕에 피부 걱정은 없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탱글해진 피부를 보며 진촌의 또 다른 여자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원장님 잘하시더라~~~ 지인 할인도 되고!!"
"엇!! 나도 바로 예약해야겠다~~~"
애 키운다고 10년을 못봤는데 그 세월이 무색하게도 열 아홉 그 때처럼 우리는 한없이 즐겁고 그저 반가웠다. 어릴 때 친구는 그래서 좋은건가보다. 서로의 찌질함과 성장 과정을 아 알고 있어서 부끄러울 것도 없고ㅎㅎ
비오는 수요일, 열 아홉 스물, 스물 다섯, 스물 일곱. 뭉텅 뭉텅 떠오르는 그 날의 기억들로 오늘은 꽤 즐거웠다. 꼭 그 날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