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자취 애로사항
새집에 적응을 하고, 나의 첫 자취방이라는 애정이 생겨 청소도 열심히, 세탁도 꾸준히, 단장도 말끔히 하며 지내던 어느 날 밤,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방 안이 깜깜해졌다. 정전이었다. 당연히 주변 건물 모두 정전일 거라 생각했고, 한국처럼 몇 분 뒤에 전기가 다시 들어올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창문을 통해 비치는 거리의 가로등 불빛을 보고 우리 집만 정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그와 동시에 나는 잠에 빠졌다.
다음날 아침, 바로 관리인에게 문자를 남겼다. 관리인은 건물의 문제가 아닐 경우에는 네가 수리 비용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어 살짝 따지고 나니 혼자 산다는 것은 자유와 책임을 모두 안게 되는 것이구나 싶었다. 일처리가 굉장히 느릴 거라는 예상과 달리 수리공은 몇 시간 내에 도착했다. 차단기를 열어본 그는 몇 분 안에 뚝딱 문제를 해결했다. 다행히 부품이 부서진 것은 아니라서 추가 비용은 내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려고 하는데 물이 나오지 않았다. 변기 물도 내려가지 않았다. 이번에는 곧장 관리인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는 우리 동네는 오늘 수질 점검으로 인해 물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방송 한 번에 미리 알고 준비하던 일이 외국에 오니 당황스러운 일이 되었다. 외국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현지인은 생각하지 못할 불편함을 겪게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자 문제도 그랬다. 무비자 기간인 3개월이 끝나갈 무렵, 나머지 9개월에 대한 학생 비자를 받으려 갔더니 코로나로 인해 딸랑 3개월짜리 단기 비자만 발급해주는 것이 아닌가? 시간이 흐르고 나머지 6개월에 대한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또다시 이민국으로 향했다. 필요한 서류는 다 준비되었기에 자신 있게 제출을 했는데 보험이 끝나는 날과 수업이 끝나는 날이 다르다는 이유로 비자발급을 거절당했다. 초반에 자체 자가격리로 인해 빠진 일수만큼 학원에서 보충해주었다는 말을 덧붙이기 무섭게 그건 네 사정이고,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차가운 답변이 돌아왔다. 결국 세 번째 방문을 하고 나서야 나의 체류를 법적으로 지켜줄 테두리를 갖게 되었다.
참, 나는 여름에도 온수로 샤워를 한다.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닭살이 돋는다. 그런데 어느 날, 온수 버튼이 고장이 났다. 관리비를 조금 아껴보겠다고 온수를 사용할 때만 켰다가 껐는데 다시 켜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걸려야 정상화가 될까 생각을 하며 수리공을 기다리는 동안 얼마 전에 아시아마트에서 사 온 너구리를 끓여먹으려고 했다. 봉지를 뜯는 순간, 있어야 할 게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너구리의 상징인 다시마가 없었다. 면을 뒤집었는데도 없다. 포장지는 내가 아는 너구리가 맞는데 내용물 너는 누구니?
갑자기 서러워졌다. 해외에서 산다는 것은 분명 설레는 일이다. 그리고 만약 그 해외가 유럽이라면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든 외국에서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때로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있어야 할 게 없이 살아가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90도 인사나 손인사 대신 포옹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나니 한국의 노란색 고구마가 아닌 몰타의 주황색 왕고구마에 익숙해지고, 물에 한참은 불려야 한국 쌀밥과 비슷한 식감을 갖는 쌀이 맛있게 느껴지는 날이 오겠지라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