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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신 Jan 08. 2022

나, 휴식이 아니라 휴직이 필요해.

00. 프롤로그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고 근무환경이 바뀌었던 해에 나는 자연스레 오춘기를 맞이했다. 순수했던 10대를 지나 생기 있던 20대를 보내고 나니 없던 강박관념이 생겼다. '이젠 30대니까, 더 이상 신입도 아니니까'라는 말로 틀을 만들어놓고 선을 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선 안의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루하루 내 일상에 충실한 삶을 살았는데 인생 가방 안은 텅 비어있었다. '다취미 증후군'을 가진 나는 그동안 얕게, 그러나 넓게 경험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 애매한 경험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해 겨울, 사촌 동생과 함께 3주 동안 이탈리아 밑의 작은 섬나라인 몰타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몰타는 제주도 6분의 1 크기를 가진 아주 작은 섬나라이다. 몇 년 전에 인터넷 사이트를 둘러보다 우연히 몰타의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지중해 바다의 반짝이는 물결이 내 마음을 일렁이게 만들었고 유럽이 주는 낭만적인 분위기는 나를 매료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계절이 있긴 하지만 한겨울에도 반팔을 입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든가, 365일 중에 300일 이상이 화창하다는 문구는 마음속 비행을 시작하기에 딱 좋았다.

  평일에는 어학원에서 영어 수업을 듣고 관광지를 둘러보며 여행을 했다. 우리는 어학원이 운영하는 레지던스에 머물렀다. 학원까지 뛰어서 3분 거리인 '파처빌'이라는 곳에 위치했었는데 굉장히 깔끔했다.(후에 몰타에 1년 동안 살면서 몰타라는 나라가 그렇게 청결에 신경을 쓰는 나라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지만, 그 당시에는 매일 청소되어 있던 화장실과 자국 하나 없는 벽면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지하에 있는 공용 주방에서는 다양한 국적과 인종을 가진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 번은 김에 밥을 싸 먹고 있었는데 한 외국인 친구가 김을 보고 그건 무엇인지 아주 궁금해하였다. 나의 말과 행동이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굉장히 큰 인상을 줄 수 있구나 느꼈던 순간이었다. 어느 날은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한 남자가 나와 사촌 동생의 짐을 번쩍 들어다 주었다. 자신의 여자 친구가 한국인이라 곧 한국에 간다는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사라졌다. 내가 누군가에게 한국에 대한 인상을 준 것처럼 나 또한 몰타인에 대한 깊은 인상을 받았던 순간이었다.

  주말에는 이웃 나라로 여행을 다녀왔다. 몰타가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몰타에서 보던 웬만한 브랜드들이 모두 영국 브랜드였다는 것을 런던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몰타라는 나라에 대한 정이 더 깊어졌다. 여행을 마치고 수업을 위해 다시 몰타로 돌아왔을 때 알 수 없는 포근함을 느꼈다. 고작 몇 주 머무른 곳인데 이곳에서는 뭐든 편하게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여러 날이 지나 어느새 다시 한국에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몇 없는 몰타 맛집 중 하나인 햄버거 가게(휴고 씨, 한국에 지점 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에서 사촌 동생에게 “여기 더 머무르고 싶다, 한국 가기 싫다.”라며 투정을 부렸다. 아홉 살이나 어리지만, 친구 같은 나의 사촌동생은 아무렇지 않게 "언니는 여기 또다시 올 것 같아. 내 느낌이 그래."라고 나를 달래주었다.

  그리고 정확히 일 년 후, 그녀의 예상대로 나는 몰타 공항에 다시 도착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내적으로 휴직을 하기 위해서 1년 동안 영어공부를 무진장 열심히 했고, 외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험이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지인들에게 비행기만 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 아니냐고 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 없이 몰타에서의 1년을 가득 채우고 돌아왔다. 2020년은 나에게는 인생에 다시없을 찬란한 한 해였다. 30년 동안 겪었던 희로애락에 버금가는 풍부한 감정을 느꼈던 한해이기도 하였다.

  결석 한번   없이 학창 시절을 보내고 휴학 한번   없이 대학교 졸업을 하고 정해진 일을 하던 나의 삶에 휴직이라니 괜히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면에서는 왠지 모르게 안정감이 느껴졌다. 많이 보고 배우고, 느끼며 오감을 채울  있는  해가   같은 기대감으로 시작한 나의 휴직 생활이자 인생 공부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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