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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신 Jan 19. 2022

다섯 발자국 차이로 와이파이가 끊겨버렸네.

03. 나의 동거인들

  혼자 살집을 구하기 전에는 유학원이 임대하고 있는 플랫에서 머물렀다. 방 4개, 화장실 2개, 그리고 적당한 크기의 거실, 부엌과 하이라이트인 테라스가 있는 플랫이었다. 스위기라는 지역에 위치했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집이라서 굉장히 깨끗하고 깔끔해서 머무르는 내내 편안했다. 단 한 가지, 와이파이 문제만 빼고 말이다. 거실에 있는 와이파이 공유기의 신호는 내방까지 전달되지 못했다. 그래서 유튜브를 보거나 넷플을 보기 위해 거실에서 다운을 받은 후, 내 방에 가서 편하게 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으로부터 당분간 온라인 수업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방 와이파이 안 되는데…?’하며 걱정하는 표정을 플랫 메이트가 읽은 것일까? 거실에서 편하게 수업 들으면 되겠다고 배려해주었지만, 왠지 모르게 쑥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휴대폰의 핫스폿을 이용해서 아이패드로 수업을 들었다.


  당시 나랑 같이 머무르고 있던 플랫 메이트는 다른 학원에 다니고 있던 한 살 어린 동생, 연수차 방문한 동갑내기 친구, 휴가를 온 예쁜 언니, 이렇게 세 명이었다. 동생의 방은 거실과 가장 가까워서 와이파이 신호가 잘 잡혔다. 친구의 방은 작은 베란다가 있어서 개인 빨래를 널기도 좋았고 햇살을 맘껏 누릴 수 있었다. 언니의 방은 개인 화장실이 있어 제일 넓었다. 화장실이 있는 언니 방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개의 방은 월세가 동일했다. 그래서 친구와 동생이 떠나면 두 개의 방 중 한 곳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에는 그전에 혼자 살집을 구해서 이사를 갔지만 말이다.


  휴가를 온 예쁜 언니는 승무원이었는데 한 달 정도 몰타에 여행을 왔다. 유리 공예로 유명한 임디나에 가서 구매한 예쁜 화병에 꽃을 꽂았는데 자꾸만 시든다길래 머리를 맞대어 이유를 찾아보려고 했고 여기저기 같이 구경하러 가자고 계획도 세웠는데 어느 날 아침, 10분 만에 짐을 싸서 급하게 출국을 했다. 이유인즉슨, 코로나로 인해 항공편이 자꾸 줄어들고 있고 어쩌면 공항이 폐쇄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친해질 시간도 없이 떠나가서 아쉬웠지만, 짧은 시간 동안 따뜻한 언니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한 살 어린 동생은 네 명 중 가장 일찍 온 친구였다. 외국계 회사를 다니다 퇴사를 하고 6개월 과정으로 몰타에 온 것인데 배려심도 깊고 나와 달리 차분하고 꼼꼼한 성격이라서 동생이지만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몰타에 함께 있을 때 동생의 생일이 있어서 함께 한식집에서 식사를 하고 케이크와 샴페인으로 집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기도 했다. 어느 날에는 동생의 넷플릭스 아이디로 ‘이태원 클래쓰’를 정주행 하느라 동생, 친구, 나 셋이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초기 일정보다 일찍, 갑자기 떠나게 되어 아쉬움이 두배가 되었다.


  동갑내기 친구는 변호사였다. 연수차 5개월 일정으로 몰타에 머무르고 있던 친구였는데 내가 오기 직전까지 유럽 곳곳을 여행했었다고 한다. 플랫 메이트들이 하나 둘 떠나게 되고, 코로나 때문에 새로운 메이트들은 오지 않자, 단 둘이서 넓은 플랫에서 지내게 되었다. 친구는 자기만의 루틴이 확실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명상을 하고 테라스에서 햇빛을 쐬고 연수를 들었다. 그리고 양배춧국과 같은 건강식을 먹고 저녁에는 꼭 러닝을 다녀왔다. 덕분에 나도 홈트를 시작하게 됐고 재료 본연의 맛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친구의 일정도 곧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곧 혼자 살집을 구했고, 친구가 도와준 덕분에 이사도 수월하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사하고 난 뒤에 친구는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고, 친구가 떠나기 전 며칠 동안은 내가 예전의 플랫에 머무르며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인생, 여행, 진로, 연애, 가족 등 공감대를 형성하며 썰렁한 집의 공기를 채워나갔다.


  어떻게 보면 너무 신기한 것 같다. 한국에서는 다른 일을 하며 다른 지역에서 살다가 서로의 목적을 위해 온 곳에서 인연을 맺게 되는 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몰랐던 세계를 접하는 것 같아 설레고 들뜬다. 가끔은 자극도 받고, 공감도 하고, 본받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환경에 놓이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아직 나의 신호가 전해지지 않았지만 분명 연결이 된 세계가 더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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